글 뭉치
20200821 : 무지개빛 길벗체로 세상에 사랑을 새깁시다
2020. 8. 21. 20:03레인보우 플래그가 등장하기 전까지 미국 내 퀴어 커뮤니티를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심볼은 핑크색 역삼각형 (Pink Triangle) 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국가의 적’으로 규정한 게이, 바이섹슈얼 남성, 트랜스젠더 여성을 체포해 수용할 때, 그들의 죄수복에 달아주었던 심볼이 핑크색 역삼각형이었던 것에서 유래한 상징이다. 마치 백인들이 경멸과 증오를 담아 부르던 멸칭 ‘N-word’를 전유해 자신들의 것으로 만든 흑인들이 그랬듯, 미국의 퀴어 커뮤니티 또한 그 핑크색 역삼각형을 자신들의 자긍심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전유해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퀴어를 향한 억압과 차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핑크색 역삼각형을 쓰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었다. 인권운동가 길버트..
20200802 : 당연한 걸 당연하다 말하는 싸움입니다. 질 리가 없죠.
2020. 8. 2. 20:04얼마나 무시무시한 광고였기에 찢어가며 막아야 했나? 7월 31일 서울지하철 신촌역에 게시되었던 국제 성소수자혐오반대의 날 공동행동(이하 공동행동) 캠페인 광고는, 8월 2일 갈기갈기 찢긴 채 발견됐다. 광고가 담고 있던 메시지에 동의하지 않은 누군가, 인적이 드문 새벽을 틈타 광고판을 찢은 것으로 추정된다. 기념 인증 사진을 찍으며 뿌듯함을 느끼려 했던 성소수자들과 앨라이(자신이 직접적인 이해당사자가 아님에도 운동에 연대하는 사람. 이 글에서는 성소수자 인권 운동에 연대하는 시스젠더-헤테로섹슈얼을 지칭한다.)들은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광고 훼손 소식에 크게 낙담했다. 광고는 그러지 않아도 한참을 늦게 걸린 참이었다. 원래는 5월 17일 국제 성소수자혐오반대의 날(IDAHOBIT, 이하 아이다호 데이)에 2..
20190907 : 고기를 덜 먹는 삶을 향해서
2019. 9. 7. 02:46난 고기를 좋아한다. 특히나 질 좋은 소를 레어에 가까운 미디엄 레어로 익혀서 씹을 때 육즙과 핏물이 같이 떨어지는 순간을 사랑한다. 한번은 오로지 질 좋은 소고기를 먹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친구들과 함께 강원도를 다녀온 적도 있었다. 동쪽으로 동쪽으로 가다가 사당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외국에 나가는 것 같은 피로를 느끼는 나 같은 인간이 강원도를 간다는 건 많은 걸 의미한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 사람들이 채식주의자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생각도 자주 한다. 나의 아버지는 오래 전부터 건강 문제로 포유류와 조류를 드시지 않으셨고, 이제는 종교적인 이유로 어류와 오신채도 드시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을 찾는 건 늘 어려운 일인데, 사찰음식점이나 혹은 불자들을 위한 베리에이..
20190830 : 임명 논란이 놓치고 있는 것들
2019. 8. 30. 15:21지금 제기되고 있는 개인적인 의혹들을 곰곰이 생각해봐도, 보수 정권에서 조 후보자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던 이들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그럼에도 임명이 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청문회를 거친다면 아마 임명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임명이 된다면 사법개혁을 잘 끌고 갈 법무장관이 될 거라 생각한다. 다만 지금은 조국 후보자를 지지하는 분들도, 반대하는 분들도 모두 조금씩 놓치고 계신 게 있는 듯 하다. 여당과 그 지지자분들은, 많은 이들이 지금의 정권이 들어설 때 “구시대의 막내”를 바랐던 게 아니라 “새시대의 첫째”를 바랐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주셨으면 어떨까. 노무현 대통령께서 쓰셨던 표현을 차용해 표현하자면 "태종이 아니라 세종을 바랐던” 것이다. 단순히 전임자와 비교해 더 나은 사람, 상대적..
20190607 : <기생충>의 사운드스케이프
2019. 6. 7. 11:34을 세 번째 관람하며 뒤늦게 깨달은 것. 세번째 문단에 예고편에 나온 적 없는 내용에 관한 경미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기우(최우식)가 처음 박사장(이선균)네 집에 과외 면접을 하러 들어가는 장면, 대문이 열리는 순간 문틈으로 안쪽 계단을 따라 심어진 대나무들이 바람에 일렁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는 기우의 시선을 따라 카메라도 함께 이동하면, 소리도 점점 더 넓어진다. 숲속을 걷는 듯 나뭇잎들이 서로 부대끼며 내는 소리가 기우를 감싸는 가운데, 은근슬쩍 어디서 날아온 건지 알 수 없는 새들의 울음까지 끼어들어온다. 담장 하나 넘어왔을 뿐인데, 박사장네 집 정원은 길거리와는 사운드스케이프부터 완전 다른 공간이다. 외부의 소리를 차단하고 내부에 인공적으로 조성한 평화로움을 한..
20190530 : 구체적인 스포일러는 없는 '기생충'(2019) 리뷰
2019. 5. 30. 13:25구체적인 스포일러는 없지만, 영화를 온전하게 즐기고 싶으시면 피하시는 게 좋을. 두서없이 써 본 관람 평. 1. 칸 황금종려상이라고 해서 어려운 예술영화일 거라고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는 작품이다. "야, 우리한테도 왕가위가 있다!" 쪽이 아니라, "짜샤들아 봤냐, 이게 우리 판 스필버그다!" 쪽에 가까운 작품. 장르적 쾌감과 주제의식이 기이하게 섞여있는데, 그 기이함 자체도 작품의 재미에 복무한다. 2. 상승운동과 하강운동의 반복. 무엇이 내려오고 무엇이 올라오는지를 집중해서 잘 보면 더 많은 걸 볼 수 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인물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위 아래로 이동하는 오브제들의 움직임도 의미심장하다. 3. 1차 예고편과 2차 예고편의 두 대사가 힌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차 예고편에선 기택..
20190519 : '독재자의 후예', 제 발 저리다
2019. 5. 20. 01:19문재인 대통령이 5.18 광주항쟁 39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5.18의 진실은 보수.진보로 나뉠 수 없습니다. 광주가 지키고자 했던 가치가 바로 '자유'이고 '민주주의'였기 때문입니다. 독재자의 후예가 아니라면 5.18을 다르게 볼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한 것을 두고,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은 이렇게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독재자의 후예'를 운운하며, 진상규명위원회 출범 지연의 책임을 국회 탓으로 돌리고 사실상 우리당을 겨냥하는 발언을 했다. 누차 말씀드린 것처럼, 자유한국당의 전신이 바로 민주화운동 특별법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진상규명위원회의 경우, 우리는 이미 자격이 충분한 위원을 추천했지만 청와대가 이를 이유 없이 거부했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20190425+20190503 : 피해자 정체성 청구와 살부의식의 부재
2019. 5. 11. 23:142019년 4월 25일 의 20대 남성 관련 기사들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 조사 결과를 보면 20대 남성이 젠더 이슈에서만큼은 무의식적으로든 전략적으로든 피해자 정체성을 내면화하면서 여성과 페미니즘 진영을 가해자로 상정하는 양상을 관찰할 수 있고, 기사는 이를 징후적인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피해자 정체성을 탈취해오는 방식의 전략이 비단 20대 남성만의 것인가? 예멘 난민과 무슬림들에 대한 증오발언을 일삼으며 '예멘 난민을 수용하는 한국인'의 프레임을 '강간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농후한 예민 난민 남성과 억지로 더부살이를 해야 하는 한국 여성' 프레임으로 전환해 피해자의 자리를 바꾸려 들던 일부 20대 페미니스트 여성들을 기억한다. MTF 트렌스젠더를 향한 증오와 혐오 선동을 조장하기 위해 프..
20190408 : 미처 하지 못했던 말들
2019. 4. 8. 01:221. 그를 직접 본 일이 두 차례 있었다. 첫 번째는 를 녹음하러 상암 MBC로 매주 출근하던 시절 라디오 스튜디오 복도에서였고, 두 번째는 그가 팬사인회를 하던 신촌 현대백화점 광장 앞에서였다. 두 차례 모두 그는 이를 활짝 드러내며 웃고 있었고 나는 얼어붙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 갑자기 다가와 마음을 고백하는 게 아무래도 폐가 될 것 같아서 말하지 못했다. 당신의 노래와 당신의 말들을 참 좋아한다고, 그게 순간순간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된다고. 늘 후회는 시간이 지난 뒤에야 온다. 그때 그 고백을 했었으면 어땠을까. 하긴, 낯선 남자의 서툰 고백 따위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느냐만. - 2. 그에 관해 글을 쓸 일이 세 차례 있었다. 처음은 그가 강은하씨의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를 읽고 지지의 ..
20190320 : 스윙키즈를 끝끝내 긍정할 수 없었던 이유
2019. 3. 20. 02:57(2018)를 두번째 관람하고서야(처음은 극장에서, 두번째는 VOD로.) 첫번째 관람할 때 느꼈던 찜찜함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하 스포일러. “자유에 대한 갈망은 이념을 초월한다”는 메인 테마를 제대로 전달하려면, 로기수(도경수)는 탭댄스에 이끌려 이념을 배반하는 캐릭터여야 했다. 그래서 로기수는 영화 초반부터 수용소 내 최고의 트러블메이커, 최고의 문제아, 공산포로 진영 내 ‘인민영웅’으로 제시된다. 이런 공산청년조차 가슴이 뛰도록 만드는 춤! 자유! 문제는, 기수는 단 한 순간도 이념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짚어보자. 기수는 전체주의자가 아니다. 같은 공산포로들이 수용소장(로스 케틀)의 심부름꾼으로 일하는 삼식(송재룡)을 린치하려 할 때, 한 포로가 칼을 꺼내들자 기수는 제가 먼저 ..
20190303 : 말하는 몸
2019. 3. 3. 17:191. “남자들은 거울을 보며 ‘나 정도면 나쁘지 않지’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난 늘 갸우뚱한다. 살면서 내 몸에 대해 안도해 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온 몸에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 연일 뛰어다니던 또래 친구들과 달리 나는 늘 어색하게 걷고 느리게 뛰는 과체중의 책벌레였고, 자연스레 무리가 즐기는 유희에서 제외되곤 했다. 물론 처음부터 내 몸을 수치스레 여긴 건 아니다. 하지만 무리에서 도태되면서, 내 둔한 몸동작을 조롱하는 또래들의 눈빛을 보면서,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살은 언제 뺄 거냐고 채근하는 친척 형제들의 말을 들으면서 난 자연스레 수치를 배웠다. 이게 창피해야 할 일인가 보다. 내 몸은 남들 보기에 밉고 부자연스러운 몸인가 보다. 그리고, 어머니가 있었다. 아버지와 달리..
일기 | 20180210
2018. 2. 10. 03:13아주 오래 블로그에 새 글을 쓸 엄두를 못 냈다. 다른 핑계 댈 것도 없다. 우울해서 그랬던 거지. 하여 페이스북에 적었던 오늘의 생각을 여기에 옮겨 적어둔다. 이 기록이 훗날 다시 우울이 몰려올 때 내게 동앗줄이 되어주길 바라며. 프리랜서의 삶이라는 게 그렇다. 언제 약속을 잡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다. 프리랜서라는 말이 처음 한국에 소개되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그게 자신이 자유롭게 노동시간과 여가시간을 결정할 수 있는 멋진 노동형태라고 생각했지만, 본질은 발주처의 일정에 맞추기 위해 내 모든 일정을 상시 비워둬야 하는 24시간 대기상태의 노동 아닌가. 그러니 프리랜서가 확실하게 약속시간을 확정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경우 중 하나다. 아예 그 시간대에 들어올 지 모르는 잠재적인 노동기회를 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