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뭉치/잡상과 일기
20190907 : 고기를 덜 먹는 삶을 향해서
2019. 9. 7. 02:46난 고기를 좋아한다. 특히나 질 좋은 소를 레어에 가까운 미디엄 레어로 익혀서 씹을 때 육즙과 핏물이 같이 떨어지는 순간을 사랑한다. 한번은 오로지 질 좋은 소고기를 먹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친구들과 함께 강원도를 다녀온 적도 있었다. 동쪽으로 동쪽으로 가다가 사당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외국에 나가는 것 같은 피로를 느끼는 나 같은 인간이 강원도를 간다는 건 많은 걸 의미한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 사람들이 채식주의자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생각도 자주 한다. 나의 아버지는 오래 전부터 건강 문제로 포유류와 조류를 드시지 않으셨고, 이제는 종교적인 이유로 어류와 오신채도 드시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을 찾는 건 늘 어려운 일인데, 사찰음식점이나 혹은 불자들을 위한 베리에이..
20190607 : <기생충>의 사운드스케이프
2019. 6. 7. 11:34을 세 번째 관람하며 뒤늦게 깨달은 것. 세번째 문단에 예고편에 나온 적 없는 내용에 관한 경미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기우(최우식)가 처음 박사장(이선균)네 집에 과외 면접을 하러 들어가는 장면, 대문이 열리는 순간 문틈으로 안쪽 계단을 따라 심어진 대나무들이 바람에 일렁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는 기우의 시선을 따라 카메라도 함께 이동하면, 소리도 점점 더 넓어진다. 숲속을 걷는 듯 나뭇잎들이 서로 부대끼며 내는 소리가 기우를 감싸는 가운데, 은근슬쩍 어디서 날아온 건지 알 수 없는 새들의 울음까지 끼어들어온다. 담장 하나 넘어왔을 뿐인데, 박사장네 집 정원은 길거리와는 사운드스케이프부터 완전 다른 공간이다. 외부의 소리를 차단하고 내부에 인공적으로 조성한 평화로움을 한..
20190408 : 미처 하지 못했던 말들
2019. 4. 8. 01:221. 그를 직접 본 일이 두 차례 있었다. 첫 번째는 를 녹음하러 상암 MBC로 매주 출근하던 시절 라디오 스튜디오 복도에서였고, 두 번째는 그가 팬사인회를 하던 신촌 현대백화점 광장 앞에서였다. 두 차례 모두 그는 이를 활짝 드러내며 웃고 있었고 나는 얼어붙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 갑자기 다가와 마음을 고백하는 게 아무래도 폐가 될 것 같아서 말하지 못했다. 당신의 노래와 당신의 말들을 참 좋아한다고, 그게 순간순간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된다고. 늘 후회는 시간이 지난 뒤에야 온다. 그때 그 고백을 했었으면 어땠을까. 하긴, 낯선 남자의 서툰 고백 따위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느냐만. - 2. 그에 관해 글을 쓸 일이 세 차례 있었다. 처음은 그가 강은하씨의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를 읽고 지지의 ..
일기 | 20180210
2018. 2. 10. 03:13아주 오래 블로그에 새 글을 쓸 엄두를 못 냈다. 다른 핑계 댈 것도 없다. 우울해서 그랬던 거지. 하여 페이스북에 적었던 오늘의 생각을 여기에 옮겨 적어둔다. 이 기록이 훗날 다시 우울이 몰려올 때 내게 동앗줄이 되어주길 바라며. 프리랜서의 삶이라는 게 그렇다. 언제 약속을 잡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다. 프리랜서라는 말이 처음 한국에 소개되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그게 자신이 자유롭게 노동시간과 여가시간을 결정할 수 있는 멋진 노동형태라고 생각했지만, 본질은 발주처의 일정에 맞추기 위해 내 모든 일정을 상시 비워둬야 하는 24시간 대기상태의 노동 아닌가. 그러니 프리랜서가 확실하게 약속시간을 확정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경우 중 하나다. 아예 그 시간대에 들어올 지 모르는 잠재적인 노동기회를 포기..
20170517 : IDAHOT을 맞이해, 친구 A에게.
2017. 5. 17. 19:19내 친구 A야. 몇 년 전 새로 만나는 사람이 생겼다는 너의 말에 난 누구냐고 물었고, 그게 너와 같은 지정성별을 지닌 사람이란 말을 듣고는 화들짝 놀랐다. 그 전에 이성애 연애를 했었던 너니까, 당연히 그 연장 선상일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랐던 건 네가 그 사실을 내게 별 망설임 없이 이야기해줬다는 거였다. 너에겐 내가 그렇게 믿을 만한 사람이었던 걸까. 내가 네게 그런 신뢰를 받아도 좋은 사람인지 확신이 들지 않아 조금은 황송했다. 네가 네 성적 지향을 이야기해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고, 해서 난 네가 무언가를 고민하고 결정할 때마다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을 수 있었다. 네가 양성애자인지 범성애자인지 헷갈려 할 때, 네가 가족에게 커밍아웃할지 말지 고민할 때, 커밍..
20170416 : 부활절 묵상
2017. 4. 16. 11:33이제 성당을 나간 세월보다 안 나간 세월이 더 긴 냉담자가 되었으나, 여전히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은 기분이 미묘하다. 3년만에 뭍으로 올라온 세월호 앞에서, 참사 3주년에 맞는 부활절이라니. 기분이 이상할 밖에. 예수께서는 부활하시어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이시곤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루카의 복음서 24장 46절부터 48절) 중요한 점. 죄를 용서하기 위해선 회개가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 회개는 죄없이 희생되었던 이의 이름 앞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20170129 : We will rebuild, with LOVE!
2017. 1. 29. 14:26작년 연말 도널드 트럼프의 미 대통령직 당선이 확실해진 직후 나는 오랜만에 만취했고, 취기가 가실 무렵 SNS에 이런 글을 썼다. "모든 사회에는 암묵적인 룰들이 있습니다. 정치가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컨센서스를 형성하고 하는 것들이죠. 트럼프는 그런 룰들을 깨뜨립니다. 만일 트럼프가 이기면 공화당과 민주당이라는 두 개의 거대정당이 모두 기본으로 돌아가서 스스로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거기서부터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절박한 바램입니다. (중략) 나는 단지 힐러리가 절대적인 이너시아(관성)을 대표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두렵습니다. 그것이 무엇보다도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그녀는 차가운 전사입니다. 은행들과도 연결되어 있구요. 그러면서 사회적으로 진보적인 것처..
20161127 : 나는 우리가 너무 불쌍해
2016. 11. 27. 12:17김의성 아저씨가 어떤 맥락에서 저 이야기를 했는지 난 모른다. 하지만 김의성 아저씨 말처럼 난 우리가 너무 불쌍하다. 5주 전을 생각해보면, 그 날은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어. 그 날은 트랜스포머 차벽이 있었고 의경들이 시위대를 밀어서 인도로 올렸고 물대포가 나올 수 있단 이야기와 공포가 온 군중을 휘감았었단 말이지. 그런데 이게 100만에 육박하는 인파가 되자 갑자기 꼬리를 말면서 평화롭고 경이로운 집회문화 운운하더라. 그러면서도 보는 눈이 적은 농민들 상경길은 무력을 써서 막고 서른 명을 연행했지. 어제 집회의 목표 인원은 200만이었다더라. 누군가는 300만을 말하기도 했고. 어딘가 심장이 두근대면서도 동시에 불편했다. 목표 숫자를 정해놓고 공표해버리면, 그에 못 미치는 인원이 모이면 김이 새버리는..
20161107 : 맥도날드 애플파이
2016. 11. 7. 05:16요즘 너무 정치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오늘은 장안의 화제인 맥도날드 애플파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이게 벌써 20여년 전의 이야기니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뭐 본디 이야기라는 게 출발지점하고 도착지점만 맞으면 메데타시 메데타시 아닌가. 그때가 아마 5학년 때였을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을 했고, 큰누나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그 전까지만 해도 늘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거나 취업을 한 친척들이 한 명씩은 우리 집에서 더부살이를 했으니까, 내 기억 속 우리 집 가족은 최소 여섯 명이었다. 이혼이란 단어 앞에서 어찌 반응하면 좋을지 몰라 안절부절하던 내 친구들과 날 불쌍하게 바라보던 어른들의 우려와는 달리 난 딱히 불행하진 않았다. 뭐, 같이 살 때 행복한 이들이 있듯이 따로 떨어..
20160917 : 불완전함의 아름다움
2016. 9. 17. 23:50사람은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불완전하다. 우린 때로 탐욕스럽고 게으르고 불결하고 미숙하고 인정에 흔들리거나 혹은 너무 냉정하다. 완전한 이상향에 얼마나 가까운가를 미추를 가르는 기준으로 삼는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추하다. 그러나 나는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필수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우리는 완전해질 수 없다. 누가 옆에서 뭐라 해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그걸 안다. 그럼에도 사람은 끊임없이 완전한 이상향에 도달해 보려는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며 부질없는 몸부림을 멈추지 않는다. 어리석은 일인데, 난 그 무모한 어리석음에 사람의 아름다움이 거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조금은 제 자신을 긍정하며 추석 연휴를 마무리하도록 하자. 내게 주는 아주 약소한 상. 썸네일용 사진은, ..
20151114 : 어느날 동물병원을 나오면서
2015. 11. 14. 23:091. 얼룩이의 스케일링 예정일이었다. 치주염이 심했다. 고양이에게 스케일링이란 개념을 설명할 수 없으니 전신마취가 필요했고, 전신마취가 필요하니 13시간 금식을 시켰다. 아이는 밤새도록 짜증을 내다가 병원에 갈 기미가 보이자 침대 밑에 들어갔다. 꺼내는데 한 세월이 필요했다. 시위의 여파가 없진 않아 길은 평소보다 막혔고 얼룩이는 교통체증 내내 겁에 질려있다가 병원에 도착했다. 2. 환자의 보호자라서 병원 근처에서 대기 중이었는데 기분이 묘했다. 내가 아는 모두가 집회에 나가 차벽에 막히고 최루액을 뒤집어 쓰는 동안, 나는 그 현장에서 한발자국 정도 떨어진 홍지동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북악산과 북한산을 병풍처럼 거느린 홍지동은 너무도 평온해서 10만이 모인 집회 소식 같은 건 와닿지 않았다. ..
20150817 : 며칠 간의 페북 잡담들 모음
2015. 8. 17. 08:58난 뼛속까지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안 좋은 습성이 배인 사람이라, 불과 10여년전까지만 해도 맨스플레인을 밥 먹듯 하곤 했다. 음, 맨스플레인이라기보단 그냥 만인에 대한 훈장질이라고 해두는 게 정확할 거다. 남성보다 여성에게 특별히 더 설명질을 했던 건 아니고, 여성이기 때문에 잘 모를 거라 생각했던 것도 아니니까. 사실 그냥 '나님이 쫌 잘났'기 때문에(...) 성별을 막론하고 상대를 무시한 것에 가깝다. 겉으로는 늘 겸손한 척 했지만, 본심은 저따위였다. 와, 이렇게 쓰고 나니까 그 시절의 나를 찾아가 무진장 때려주고 싶구만. 그 어두운 기억을 굳이 파헤치고 들어가 구체적인 실제 사례를 기록해 모두의 눈쌀을 찌푸리게 만들 생각은 없으나, 언젠가 누가 "저 새끼 옛날에 나에게 '블라블라블라'라고 맨스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