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뭉치
20150617 : 한겨레 토요판 페이스북 페이지 개설에 부쳐
2015. 6. 17. 12:56- 승한씨, 페이스북에 토요판 페이지가 생기거든요. 글 좀 써줄 수 있어요? 6월의 어느 날이었다. 어쩌다가 불려 나간 회식 자리, 옆자리에 앉아있던 토요판 고나무 기자가 뜬금없는 부탁을 했다. - 무슨 글이요? - 아뇨, 별 건 아니고. 그냥 페이지 좋아요 눌러주시고. 이러이러한 페이지가 생겼으니 많이들 보시라 뭐 이런 글 좀… - 아니지. 그게 아니라 토요판 페이지에 실을 만한 글을 좀 길게 써달라고 부탁해야지. 느슨하게 흘러가던 대화에 고경태 편집장이 끼어들었다. 말하자면 페이지 개설을 했으니 축전을 달라는 이야기였구나. 나는 젓가락질을 멈추고 물었다. - 200자 원고지 몇 장 분량에 고료는 얼마 쳐주실 건데요? 물론 농담이었다. 기껏해야 축전인데, 그거 한 편 공으로 써주는 게 뭐 그리 대수겠는..
20150611 : 단상들
2015. 6. 11. 11:370. 요즘 많이 우울하다. 일이 뜻처럼 잘 풀리지 않아서 우울한 건지, 우울해서 일이 뜻처럼 잘 풀리지 않는 건지 종종 헷갈린다. 원래 원인과 결과는 자주 서로의 위치를 바꿔가며 꼬리를 무는 법이라고는 하지만... - 1. 여전히 내가 그럴싸한 헛소리만 하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은 가시질 않는다.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어느 정도는 늘 가지고 있어야 글을 쓰고 말을 하는 직업을 유지할 수 있는데, 가끔 그 불안이 과할 때가 있어 키보드 앞에서 몇 시간이고 한 자도 못 쓸 때가 있다. - 2. 요즘 들어 원칙과 타협에 대해 생각해본다. A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고민하던 이들이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A'라는 해답을 내면, 어떤 이들은 A' 또한 A라는 문제를 더 교묘한 방식으로 재생산한 것에 지나..
20150504 : 얼룩이와의 3년
2015. 5. 4. 02:46얼룩이와 같이 사는 게 수월했던 순간은 없었다. 고양이와의 동거는 인간과의 동거와는 달라서, 인간의 생활양식을 고양이에게 납득시키는 건 엄청난 인내와 노력을 필요로 한다. 고양이 입장에선 본성을 누르고 인간의 라이프사이클에 맞춰줘 봐야 득이 될 게 없으니까. 지금도 난 종종 얼룩이에게 소리를 지르고, 볼기짝을 때려가며 혼내고, 밤새 마감을 방해하는 녀석에게 좀 얌전히 있으라고 윽박을 지른다. 사람들이 꿈꾸는 홀로 조용히 잘 노는 고상한 동물 같은 건 - 적어도 우리 집에는 - 없다. 그러면 대체 왜 고양이랑 살고 있느냐. 이야기가 좀 길고 복잡하니까 본문 대신 각주로 대체하자. - 사실 저 글에서 이야기 안 한 사실이 하나 있는데, 난 얼룩이를 집에 데리고 온 지 4일 만에 포기하려고 했었다. 2013년..
20150501 : '우리'라는 바운더리를 넓히는 것
2015. 5. 1. 19:241. 가끔 유투브에서 K-Pop reaction 비디오들을 찾아보곤 한다. K-Pop의 팬이거나 K-Pop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이, K-Pop 뮤직비디오들을 보고 실시간으로 반응하는 걸 찍은 영상이다. 당연히 세계 각지의 팬들이 한국 음악에 열광하는 걸 보며 국뽕을 맞자고 하는 짓은 아니다. 오히려 마이클 잭슨이나 휘트니 휴스턴의 뮤직비디오들을 Mtv나 홍콩 Channel V를 통해 보면서 헤벌쭉하던 촌놈이, 갑자기 동향의 문물이 잘 나가는 걸 보면서 얼떨떨해하는 기분에 가깝달까. 한국 사람들은 흔히 이 reactor들이 아이돌 그룹의 뮤직비디오만 소비할 거라 생각하지만, 막상 찾아보면 재미있는 지점들이 많다. 이적이나 윤상의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이들이 K-Pop의 여명을 연 개척자들이야'라고 경의를 ..
20150422 : 기묘하게 뒤틀린 내 학벌 콤플렉스에 대해
2015. 4. 22. 15:30가끔 내 학벌 콤플렉스가 이상하게 뒤틀린 형태로 폭발할 때가 있다. 명문대를 다니며 학보사를 거치고 그 과정에서 은연 중에 학벌주의를 내재화한 사람들 앞에서, 어차피 언론사는 SKY 아니면 입사가 어렵다고 냉혹한 현실을 이야기해주는 척 하며 학력차별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발동하는 기제인 것이다. "나는 국민대학교를 - 아직도 - 다니고 있다. 최종학력이 현재로서는 고졸인 셈인데. 언론사 시험을 따로 본 것도 아니고 혼자 글 쓰고 있었는데 갑자기 스카우트 되어 전업 칼럼니스트가 되었고, 마찬가지로 특채로 스카우트 되어 기자가 되었다. 그래, 명문대를 나오시고 학보사도 거치신 당신은, 대체 몇 년 동안 언론고시를 준비하셨죠? 그래서 입사하신 곳이 고작 거기예요? 어떻게든 구글 검색 쿼리에 더 잘 ..
20150416 : 우리에겐 선장이 없다
2015. 4. 16. 15:29지난 월요일 녹화. 만의 방식으로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이하기로 했다. 평상시 웃고 떠드는 느낌의 쇼였기 때문에 과연 우리의 언어로 추모와 연대의 뜻을 담아낼 수 있을까가 걱정이었다. (작년에는 그 이유로 방송을 결방했었다.) 이런 걱정은 나만의 것이 아니어서, 한겨레TV 채널 상부에선 모든 프로그램이 세월호 참사 1주기 특집을 마련하자는 안을 내놓고도 "은 여차하면 한 주 쉬어가야 하나" 하는 이야기도 있었던 모양이다. 대중문화가 사람들을 위로하고 아픔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고는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게 쉬운 위로와 이른 치유인지 잘 모르겠더라. 아직 현재진행형인 사건 아닌가. 아직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고, 밝혀지지 못한 진실이 있으니. 대통령의 말처럼 이 사건을 '안전 대한민국'으로 다시..
20150330 : 1/4분기 마무리 잡담
2015. 3. 30. 01:421. 작년에서 올해로 건너오는 무렵, 후배가 내 생일을 맞이해 편지를 한 통 써서 줬더랬다.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작년 자신이 힘들 때마다 내가 건넨 보잘 것 없는 위로의 말들이 자신에겐 아주 적확한 지점을 타격하는 위로가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아끼는 후배이고 많이 위로를 해주고 싶었으니 그 위로의 마음이 통했다면 참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가하면 F는 내게 나의 관대함에 늘 감사하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그에게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빚졌으니 그에 상응하는 마음을 주고 싶었을 뿐인데, 내가 관대하다고 느껴진다면 그 또한 내가 그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겠지. 반면 바쁘다는 핑계로 내가 연락을 소홀히 했던 - 그래선 안 됐던 - 몇몇 친구들은 내게 '필요할 때만 연락하고 연락을 주지 않는 이기적인 ..
20150324 : 나는 사과하지 않겠다
2015. 3. 24. 03:58"말 좀 똑바로 씁시다. 하인이 뭡니까, 하인이." 시청자의 항의가 있었다. SBS 를 다룬 한겨레TV 에서, 내가 극중 한정호(유준상)와 최연희(유호정)의 집에 상주하며 집안일을 봐주는 집사, 비서, 상주 도우미 등을 계속 '하인'이라고 불렀던 것이 거슬렸던 모양이다. 신분제가 폐지된 시대에 해당 직종에 종사하는 이들을 '하인'이라 부르는 건 모독일 수 있으니까. 제작진은 빠른 속도로 사과의 댓글을 달았다.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시청자들의 문제제기에 빠르게 답해야 할 의무가 있는 분들이니까. 나 또한 집사나 비서, 상주 도우미들을 제대로 된 직함으로 불러야 한다는 점에는 시청자의 항의에 동의한다. 그러나 제작진의 빠르고 진심 어린 사과와는 별개로, 나는 내가 를 설명하며 '하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에..
20150318 : 환상지 증후군
2015. 3. 18. 20:011. 통증을 동반한 환상지 증후군 Phantom limb syndrome with pain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 G54.6질병DB 29431 절단되어 상실한 신체부위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며 해당부위의 통증까지 느껴지는 질환. 헛팔다리통증이라고도 부른다. 신체의 일부를 수술이나 사고 등으로 상실한 환자의 약 60~80%가량이 경험하는 질환이며, 대부분의 경우 그 주기와 감각의 강도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줄어들다가 48시간 이내에 해소된다. 그러나 개중 극소수는 절단 이후 오랜 시간 동안 간헐적인 환상지 증후군을 호소하며, 스트레스, 불안, 날씨 변화에 따라 더 악화된 증세를 경험하기도 한다. 병의 주 원인이 무엇인지 아직까지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으나, 신체 절단 시 말초 감각신경이 함께 사라지..
20150222 : 나의 동료들에게, 혹은 나에게.
2015. 2. 22. 02:25오늘 나의 동료들과 나눴던 이야기. 어쩌면 콤플렉스로 가득 찬 스스로에 대한 고백. 한국이 여전히 음력 새해를 기념하는 관습을 유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순기능 중 하나는, 1월 1일 세웠던 계획들이 어그러졌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게 다 끝났다고 믿고 좌절하는 대신 은근 슬쩍 '새해는 지금부터 시작하는 거야'라고 털고 일어날 핑계를 주는 거라 믿는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연휴가 끝나가는 이 시점에 올리고 싶었다. 이 횡설수설이 내가 아끼는 이들에게, 나를 아껴준 이들에게, 심지어는 나와 대판 싸웠던 이들에게까지 작게나마 힘이 된다면 좋겠다. - "우리는 언제나 '더' 잘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언제든. 물론 우리는 종종 미숙하고, 어리석고, 머리로 생각하고 있다고 믿으면서도 사실은..
트위터의 '듀나체의 난' 때문에 몇 년만에 다시 끌어온, '백설 플러스 2 카레 매운맛' 리뷰
2014. 12. 16. 22:57내가 모르는 사이 트위터에서 한바탕 '듀나체의 난'이 일었나보더라. 영화평론가이자 SF작가인 듀나의 문체를 누가 누가 더 그럴싸하게 흉내내는가 하는 장난이었는 모양이다. 듀나 특유의 문체가 다소 호오가 갈리는 문체다보니 시작된 장난인가본데, 한참 보고 있자니 문득 내가 '루이와 오귀스트'라는 닉네임으로 듀나게시판 활동을 하던 2006년도에 썼던 글이 생각났다. 그 무렵 듀나의 영화 리뷰 형식을 최대한 비슷하게 패러디하는 게 목적인 글이었는데, 내가 친 수많은 노잼 개그 중 그나마 반응이 좋았던 개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지금 보면 좀 노잼이겠으나... 아래의 링크를 먼저 보고 이 글을 보길 추천한다. 그 무렵 듀나의 영화 리뷰글은 대략 이런 스타일이었다는 걸 알고 보면 아주 조금은 덜 노잼일 글이다..
20140519 : 후배K 면회일지
2014. 5. 19. 23:56어제 '가만히 있으라' 침묵행진에 참여했다가 은평경찰서로 연행되어 간 후배 K를 만나러 가던 길, 택시 안에서 택시기사는 내게 물었다. "그래도 학생들이 좀 참고 기다려보는 건 어때요? 청와대로 행진을 하는 거는...." 내가 되물었다. "청와대 앞은 법적으로 사람이 걸으면 안 되는 곳인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여러 명이 가면 아무래도..." 손에 든 게 종이 한 장과 국화 한 송이뿐인 사람들이 떼로 몰려간들 뭘 어쩔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한숨을 쉬었고 택시기사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택시에서 내릴 때쯤, 라디오에서 대통령의 대국민담화가 시작되었다. 진심 어린 사과인 듯 했던 그의 목소리에 집중하다가 은평경찰서 앞에서 내릴 무렵, 대통령은 뜬금없이 '해경은 이번 사태에 무능했고 구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