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제기되고 있는 개인적인 의혹들을 곰곰이 생각해봐도, 보수 정권에서 조 후보자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던 이들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그럼에도 임명이 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청문회를 거친다면 아마 임명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임명이 된다면 사법개혁을 잘 끌고 갈 법무장관이 될 거라 생각한다.
다만 지금은 조국 후보자를 지지하는 분들도, 반대하는 분들도 모두 조금씩 놓치고 계신 게 있는 듯 하다.
여당과 그 지지자분들은, 많은 이들이 지금의 정권이 들어설 때 “구시대의 막내”를 바랐던 게 아니라 “새시대의 첫째”를 바랐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주셨으면 어떨까. 노무현 대통령께서 쓰셨던 표현을 차용해 표현하자면 "태종이 아니라 세종을 바랐던” 것이다. 단순히 전임자와 비교해 더 나은 사람, 상대적으로 더 깨끗하고 상대적으로 더 유능한 사람의 시대를 바란 게 아니라, 그 이전의 시대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원칙과 상식이 서는 시대를 바랐던 이들이 많다. 그리고 지금의 대통령께서도 그런 시대를 열겠다고 하셨던 거고.
젊은 세대들에게서 분노나 환멸이 나오는 이유를 두고 “자유한국당 계열 학생들이 반대를 위한 분노를 조장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많은 줄 안다. 물론 실제로 그런 학생들도 많다. 그런데 그런 정파적 이익을 염두에 두고 분노하는 이들을 제하고도, 이래저래 정치혐오와 피로를 느끼는 이들이 많은 이유에 대해서도 좀 고민해주시면 좋겠다.
후자의 학생들은 조 후보자에게 제기된 의혹이 명백한 범법이어서, 혹은 자유한국당의 주장처럼 역대 최악의 짬짜미여서 분노하는 게 아니다.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고 이야기하시며 세종을 자처하시던 분들이,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경원, 김성태, 최순실은 더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조국은 상대적으로 깨끗한 사람이다.”라며 옛 시대 기준의 비교우위를 이야기하시니 실망을 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조 후보자가 직접 자녀의 학업 성취를 위해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고 압력을 행사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지도교수도 그냥 자기 의사로 좋은 평가를 준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라고 말씀하신다. 나도 그 말을 믿는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믿는다 하더라도 허탈함을 안 느끼기는 어렵지 않나. 조 후보자 개인이 어떤 위력을 행사했다는 개인적인 차원의 분노가 아니라, 보다 더 근본적인 의문과 분노가 열린 것이다. 평범한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온갖 전형들과 기회들이, 부유한 아이들이나 명망가의 자녀들에겐 이미 상식이었고 그래서 조 후보자가 딱히 다른 압력을 행사할 필요도 없었다는 사실. 그 압도적인 계급의 차이 앞에서 절망한 사람들이 많다. 개인의 층위에서 깨끗하게 살아왔다 하더라도, 이미 계급의 층위에서 어쩔 수 없는 불평등이 누적 발생되는구나 하는 절망감.
공교롭게도 이 지점은 조 후보자를 반대하는 분들께서도 많이들 놓치고 계신 지점이다. 조 후보자 자제분의 학업 성취가 공정하지 않았다고, 공정한 경쟁을 거쳐야 하지 않느냐며 분노하시는 분들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런데 정말 ‘공정한’ 게임을 하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까? 사회비평가 박권일 선생이 <한겨레>에 발표한 글 ‘영원 회귀하는 정유라’에서 날카롭게 지적하신 대목을 인용한다.
한국의 입시경쟁 체제 아래서 부모의 전략적 개입을 막는다는 게 애당초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일제고사 형식이든 수시 형식이든 마찬가지다. 어느 쪽이든 부모의 상징자본이 풍족한 쪽이 무조건 승리한다. 더 치명적인 건 설령 부모가 의식적으로 개입하지 않아도, ‘스펙’이나 능력이라 부르는 요소가 이미 경쟁이 무의미할 정도로 불평등하게 배분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말처럼 “능력이나 재능 자체는 시간과 문화자본이 투여된 산물”인 까닭이다.
(중략)
‘흙수저들은 가정 형편 때문에 학업에 몰두하기 어렵다’는 주장에 그토록 공감하는 사람들이 왜 장학금은 성적순으로 줘야 “공정”하다 여기는가? 형편이 가장 못한 이에게 가장 많은 기회와 자원을 제공하는 것은 “특혜”인가, “공정함”인가?
‘[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영원 회귀하는 정유라’ 中
박권일 | 2019년 8월 22일 | 한겨레
http://m.hani.co.kr/arti/opinion/column/906764.html
우리가 ‘공정함’이라고 부르는 가치는 종종 개인의 노력만으론 뛰어넘을 수 없는 계급적 차이를 설명하는데 실패한다. 게임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 안에 이미 불평등이 내포되어 있다면, 게임의 룰을 ‘공정’하게 만드는 것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건 불가능하다.
캔사스대 연구자 베티 하트와 토드 R. 리슬리의 2003년 연구는 충격적인 결과를 보여준다. 고소득층 가정 자녀 13명, 중산층 가정 자녀 10명, 저소득층 가정 자녀 12명, 기초생활수급가정 자녀 6명을 생후 7개월부터 만 3세까지 따라가며 조사한 결과, 아이들이 사용하는 어휘량에서 이미 급격한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기초생활수급가정 자녀가 시간당 616개의 단어를 들으며 자라는 동안, 노동계급 가정의 자녀는 시간당 1,251개의 단어를 들으며 자란다. 전문직 가정의 자녀는 같은 기간 시간당 2,153개의 단어를 들으며 자란다. 소득수준에 따라 접할 수 있는 정보의 양과 질에 압도적인 차이가 생기는데, 생애 첫 4년간 생기는 정보량의 차이는 대략 3,000만 단어에 가깝다. 0세부터 만 3세까지, 3,000만 단어의 차이를 가지고 출발하는 것이다.
가정이지만, 조사결과 조 후보자의 자제분이 아무런 문제 없이 주어진 기회에 정당하게 응한 결과로만 현재의 성취를 거두었다고, 모든 의혹이 명백하게 해소됐다고 생각해보자. 그런다고 지금 좌절을 호소하는 이들이 심적 평안을 누릴 수 있을까? 명문가 자녀들과 고소득층 자녀들에겐 훨씬 더 많은 기회와 배려들이 집중되고, 그래서 그들은 별다른 범법이나 비리 없이도 훨씬 더 유리한 자리에서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이들의 마음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주어지는 자원과 기회의 차이를 어떻게 줄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지 않고, 그 차이로 인해 필연적으로 생기는 결과의 불평등을 어떻게 고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하지 않고, 이것을 그저 조 후보자 한 사람의 임명 여부를 놓고 벌어지는 정치적 대결이라고만 그 의미를 축소한다거나 조 후보자 한 사람의 잘잘못을 따지며 ‘공정성’에 대한 논란에만 과몰입한다면 우린 정말 많은 걸 놓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