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인 스포일러는 없지만, 영화를 온전하게 즐기고 싶으시면 피하시는 게 좋을.
두서없이 써 본 <기생충> 관람 평.
1. 칸 황금종려상이라고 해서 어려운 예술영화일 거라고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는 작품이다. "야, 우리한테도 왕가위가 있다!" 쪽이 아니라, "짜샤들아 봤냐, 이게 우리 판 스필버그다!" 쪽에 가까운 작품. 장르적 쾌감과 주제의식이 기이하게 섞여있는데, 그 기이함 자체도 작품의 재미에 복무한다.
2. 상승운동과 하강운동의 반복. 무엇이 내려오고 무엇이 올라오는지를 집중해서 잘 보면 더 많은 걸 볼 수 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인물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위 아래로 이동하는 오브제들의 움직임도 의미심장하다.
3. 1차 예고편과 2차 예고편의 두 대사가 힌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차 예고편에선 기택(송강호)이 기우(최우식)에게 기특하다는 듯한 말투로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라고 말하고, 2차 예고편에선 기우가 기택에게 힘없는 목소리로 "아버지, 계획이 뭐예요?"라고 묻는다. 이 두 대사 사이의 간극에 이 가족의 불행이 있다. 다 계획이 있다면서도, 그 계획 대신 다른 계획을 입안해야 하는 불안정함.
4. 몹시 한국적인 작품인 동시에,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계급 양극화를 겪고 있는 사회라면 어느 나라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부유하기에 젠틀할 수 있는 사람들과, 절박하기에 자꾸만 선을 넘어오는 사람들.
5. 이제까지 봉준호가 그려왔던 가족들과는 달리, 이 영화에 나오는 두 가족은 소위 '정상가족' 모델을 완벽하게 이루고 있다. 이성애자 부부와 아들 하나 딸 하나.
아버지의 부재(<마더>)나 어머니의 부재(<괴물>), 부모의 부재(<옥자>)나 자식의 부재(<플란다스의 개>), 가정이 없는 이들의 분투(<살인의 추억>)와 온통 편부 편모 고아들의 집단의 혁명극(<설국열차>) 등, 봉준호가 그렸던 세계는 대부분 '정상가족'이 부재한 세계였다. 전작들에서는 인물들이 가족 구성원의 부재를 메우기 위해 더 많은 운동을 취하거나, 가족에게 얽메이지 않았기에 더 많이 움직일 수 있었다.
<기생충>은 다르다. 완벽하게 각자의 역할모델을 수행하고 있는 구성원들이 존재해서, 인물들이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한정적이다. 이와 같은 전작들과의 차이는 전에 없던 팽팽한 긴장감을 준다. 한 사람이 조금 더 많이 움직이면, 나머지 구성원들이 그에 딸려가거나 반동을 준다. 이 팽팽함이 주는 서스펜스는 봉준호의 전작들과는 전혀 다른 긴장감을 선사한다.
6. 봉준호의 전작들에서 종종 느꼈던 불만인데, <살인의 추억>이나 <괴물>, <설국열차> 같은 작품들은 막판에 고양된 정서를 한꺼번에 터뜨리는 대목에 가서는 약간 편집 리듬이 어그러지는 지점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살인의 추억>에서 서태윤(김상경)이 이성을 잃고 박현규(박해일)를 린치하러 가는 장면의 편집이나, <괴물>에서 강두(송강호) 일가가 괴물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기 위해 연기 자욱한 교각 사이를 뛰어다니는 장면, <설국열차>에서 커티스(크리스 에반스)가 엔진칸 타일 밑의 진실을 발견하는 동안 남궁민수(송강호)가 크로놀에 취한 클럽칸 히피들과 혈전을 벌이는 장면 같은 부분들. 폭발하는 정서를 어떤 순서로 정리하면 좋을지 몰라서 약간 얼버무린 것 같은 대목들.
해외 평단에서는 이 지점을 '삑사리의 미학'으로 이해하거나, 봉준호 특유의 '균열'이라고 생각하며 좋아했던 것 같은데, 사실 어떤 지점에서는 약간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감독의 통제에서 살짝 어긋나는, 통제에 실패한 순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더>에서 혜자(김혜자)가 본인도 예상하지 못한 결단을 내리며 폭주하는 순간의 간결한 편집과 비교하면 더더욱 그렇다.)
<기생충>은 그렇지 않다. 마지막 순간까지 봉준호는 거의 완벽에 가깝게 상황을 통제한다. 감독으로서의 봉준호가 몇 단계쯤 훌쩍 점프해 돌연 원숙한 거장이 된 걸 목격하는 쾌감이 있다.
7. 아마 해외에서 봤을 때 "마술적 리얼리즘"적인 장면이라고 극찬을 했을 만한 장면이 있는데, 한국인들에겐 너무나 익숙하고 너무나 현실적인 장면이라서 뿜었다. 하긴, 애초에 그 표현 자체가 "남미 문학가들이 남미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했을 뿐인데, 남미의 현실을 잘 모르는 서구권 평론가들이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가져다 붙인 표현"이라고 했다던가.
8. 송강호의 연기에 대해 더 타이핑하는 건 손가락만 아픈 일이고, 다른 배우들 이야기를 간단하게 하자면.
봉준호의 세계에 처음 들어온 이선균과 조여정은 완벽하게 자신들 색깔의 연기를 하는데, 그게 미칠 듯이 효과적이다. 봉준호가 이런 부자들의 세계를 처음 그려본다는 걸 감안했을 때, 이제까지의 봉준호 영화 속 인물들과 전혀 다른 톤으로 말하고 연기한다는 점은 엄청난 장점이다.
영화 <거인>에서 최우식의 활약을 본 경험이 있는 이들이라면 <기생충> 또한 믿고 봐도 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박소담 또한 오랜만에 본인에게 맞춤옷처럼 잘 맞는 배역을 맞아 신이 난 눈치고.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연기력으로 두각을 드러낸 신인 여성 배우에게 로맨틱 코미디나 직업물을 위장한 로맨스물 같은 거 위주로 프로젝트를 제안하는 일은 얼마나 게으르고 위험한 일인가.)
장혜진과 이정은 이야기를 해야겠다. 자세한 이야기를 하는 건 스포일러지만, <기생충>의 중후반부는 결국 이 두 중년 여성이 메인 서사의 흐름을 장악한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에서 장혜진을 좋게 보셨던 분들, 각종 영화에서 주로 감초 조연으로 나왔던 이정은을 좋게 보셨던 분들에게 <기생충>은 필견의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