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5.18 광주항쟁 39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5.18의 진실은 보수.진보로 나뉠 수 없습니다. 광주가 지키고자 했던 가치가 바로 '자유'이고 '민주주의'였기 때문입니다. 독재자의 후예가 아니라면 5.18을 다르게 볼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한 것을 두고,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은 이렇게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독재자의 후예'를 운운하며, 진상규명위원회 출범 지연의 책임을 국회 탓으로 돌리고 사실상 우리당을 겨냥하는 발언을 했다. 누차 말씀드린 것처럼, 자유한국당의 전신이 바로 민주화운동 특별법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진상규명위원회의 경우, 우리는 이미 자격이 충분한 위원을 추천했지만 청와대가 이를 이유 없이 거부했다."(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 2019년 5월 18일)
자유한국당이 추천한, '자격이 충분한'데 청와대가 '이유 없이 거부'했다는 사람은 권태오 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과 이동욱 전 월간조선 기자다. 이들이 과연 '자격이 충분'했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을 텐데, 일단 이들이 5.18 광주항쟁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하고 다녔던 사람들인지 살펴보자.
이동욱 전 월간조선 기자는 월간조선에 근무하던 1996년, '검증, 광주사태 관련 10대 오보·과장’ 기사를 통해 “광주사태와 관련해서는 거의 모든 오보가 피해자 중심으로 쏠려 있다. 피해자 편을 들면 정의롭다는 생각에 이성을 잃은 결과"라고 주장한 바 있다. 권태오 전 민주평통 사무처장 또한 2013년 유튜브 방송을 통해 광주항쟁에 대해 "소수의 선동가와 다수의 선량한 시민, 이것이 광주사태의 본질"이라고 코멘트한 바 있다.
심지어 그 동네 거물인 김무성조차 "역사적 평가가 끝난 5.18을 부정하는 것은 의견 표출이 아니라 역사 왜곡이자 금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지만, 백보 양보해 정파에 따라 광주항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를 수도 있지 않겠느냐 치자. 그러면 이들이 5.18진상규명법이 지정한 진상규명위원 자격요건은 갖췄는지 살펴보자. 진상규명법은 위원에게 아래 다섯 개 분야 중 하나에서 최소 5년 이상 종사한 경력을 요구한다.
△판사·검사·군법무관·변호사
△역사고증·군사안보·정치·행정·법·물리학·탄도학 분야 대학교수
△법의학
△역사고증·사료편찬
△국내외 인권 분야
권태오 전 민주평통 사무처장의 경력은 육군 수도군단장, 제2작전사령부 부사령관, 전 한미연합군사령부 작전참모부 특수작전처장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자격요건에 해당하는 바가 없다. 이동욱 전 월간조선 기자 또한 언론인 경력이 전부다. 청와대가 이 둘 대신 다른 이들을 추천해달라고 재추천을 요구한 건, 바로 이 자격요건 미달이 주된 요인이었다.
실제로 청와대는 자유한국당이 추천한 3명 중 나머지 1명인 차기환 변호사가 "광주에서 평화적으로 손잡고 행진하는 시위대를 조준사격한 적 없다"고 말하고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법률적 자격요건은 갖췄다는 이유로 자유한국당에 재추천을 요구하지 않았다. "자격이 충분한 위원을 추천했지만 청와대가 이를 이유 없이 거부했다"는 나경원의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거짓말이다.
나경원이 했던 말 중에 맞는 게 하나 있다. "자유한국당의 전신이 바로 민주화운동 특별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광주항쟁이 민주화운동이었음을 입법부와 사법부, 행정부가 모두 인정했던 건 김영삼의 문민정부 시절이었고, 당시 여당인 민주자유당은 오늘날 자유한국당의 전신이다.
계보만 놓고 보면 자유한국당은 실로 복잡한 정체성의 정당이다. 이 당에는 김영삼과 함께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사람들이 있고, 민중당을 만들어 진보정당 실험을 시도했던 사람들이 있다. 동시에 민주정의당과 민주공화당에서 권력의 단물을 빨며 폭압적인 군부독재에 부역한 인물들과, 그 체제가 존속되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 제 나라 국민들을 탄압했던 인물들이 같이 소속되어 있다. 독재자의 후예들과, 그 독재자와 맞서 싸웠던 왕년의 투사들이 함께 모인 이 기괴한 정당. 나경원이 이야기한 '민주화운동 특별법의 정신을 계승한 정당'과, 그가 듣기 껄끄러워했던 '독재자의 후예'라는 말은 사실 자유한국당이 걸어갈 수 있는 두 갈래의 가능성인 셈이다.
그럼에도 "독재자의 후예"라는 말만 기억에 남았다면, 그 말이 자신들을 겨냥하는 것처럼 들린다면, 그건 자신들이 걷고 있는 행보가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를 왜곡하는 극우세력과 단절하지 못하고, 광주의 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려는 이들을 진상규명위원으로 추천하려 시도하고, 광주항쟁을 모독하고 욕보이려는 사람들을 냉정하게 끊어내지 못하고, 당 차원의 처벌과 징계를 하지 않은 채 기어코 광주로 내려온 이들이라서, 저 말에 지레 제 발이 저렸던 것이다.
나경원이 정말로 '독재자의 후예'가 아니라 '민주화운동 특별법의 정신을 계승한 정당'으로 대우받고 싶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그와 그의 소속정당이 그에 걸맞은 행보를 보이면 된다. 말이나 정치적 수사 말고, 행동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