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윙키즈>(2018)를 두번째 관람하고서야(처음은 극장에서, 두번째는 VOD로.) 첫번째 관람할 때 느꼈던 찜찜함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하 스포일러.
영화 '스윙키즈'(2018)의 주인공 로기수(도경수)
“자유에 대한 갈망은 이념을 초월한다”는 메인 테마를 제대로 전달하려면, 로기수(도경수)는 탭댄스에 이끌려 이념을 배반하는 캐릭터여야 했다. 그래서 로기수는 영화 초반부터 수용소 내 최고의 트러블메이커, 최고의 문제아, 공산포로 진영 내 ‘인민영웅’으로 제시된다. 이런 공산청년조차 가슴이 뛰도록 만드는 춤! 자유! 문제는, 기수는 단 한 순간도 이념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짚어보자. 기수는 전체주의자가 아니다. 같은 공산포로들이 수용소장(로스 케틀)의 심부름꾼으로 일하는 삼식(송재룡)을 린치하려 할 때, 한 포로가 칼을 꺼내들자 기수는 제가 먼저 삼식을 발로 차고는 “음식 썰 때 쓰는 칼인데 더럽히지 말라”며 칼을 든 포로를 만류한다. 이후 친구 만철(이규성)이 밀정 노릇을 해 광국(이다윗)이 죽게 되었을 때에도, 기수의 분노는 ‘이념을 배반한 반동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네가 어떻게 나를 배신해’ 쪽에 가깝다.
기수는 치열한 반제 투사가 아니다. 만철이 “적의 보급에 타격을 입힌다”는 핑계로 미군 식량 창고에 기어들어가 버드와이저를 마시고 허쉬 초콜릿을 빼돌린다는 걸 알면서도, 기수는 그걸 타박하기보단 함께 마시며 즐기는 쪽을 택한다. 기수는 미군들을 놀리면서 그들의 럭키 스트라이크와 라이터를 빼앗아 담배를 태운다. 기수에게 단순히 미제라는 이유만으로 혐오하거나 경멸하는 일 따위는 없다.
버드와이저를 시원하게 마시고 있는 로기수. 그는 친구 만철(이규성)이 미제 물건에 맛을 들이는 와중에도 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심지어 기수는, 이념에 경도된 적이 한번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전설의 ‘인민영웅’인 형 로기진(김동건)의 등장과 함께 짐작할 수 있다. 덩치와 전투력을 지녔지만 지능은 다섯 살 수준인 형 기진을 무사히 살려내기 위해, 기수는 기진에게 “말 잘 듣고 있으라”는 당부를 남겼다. 형제가 공히 인민영웅 전사가 되면 선전용으로라도 살아남기 유리하며, 다른 전선에서 배치되어도 형의 소식을 접할 수 있을 것이란 걸 기수는 알았을 것이다.
그러니 기수가 탭댄스의 매력에 빠졌을 때 그의 고뇌가 그리 깊지 않았던 것이다. 춤을 향한 열망이 이념과 충돌하다가 마침내 이념을 이겨버려야, 비로소 자유를 향한 갈망은 이념으로 묶을 수 없다는 핵심 주제가 부각이 될 텐데, <스윙키즈>에는 그런 순간이 한번도 없다. 기수는 이념 때문에 갈등하는 게 아니라, 공산포로 사이에서 대놓고 ‘양코잽이들 춤’인 탭댄스를 출 수 없기에 주변의 눈치를 볼 뿐이다. 모스크바에서 온 춤선생에게 코사크와 깔린까를 배우고 기뻐했듯, 기수는 브로드웨이에서 온 잭슨(자레드 그라임스)이 보여주는 탭댄스를 보고 별 고뇌없이 반했다. 탭댄스가 아니었더라도, 천상 춤꾼인 기수는 처음 보는 춤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아마 바로 혹했을 것이다.
물론 기수를 확신범이 아니라 ‘그저 북쪽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인민군이 되었을 뿐, 남쪽에서 태어났다면 국군이 될 수도 있었던 청년’으로 그리는 건 나쁜 묘사가 아니다. 실제로 굉장히 많은 인민군 청년에겐 그게 조금 더 진실에 가까운 묘사일 테다. 하지만 이와 같은 캐릭터 묘사는, 영화가 후반부 들어 이념의 공포를 설파하는 순간 욱신거리기 시작한다. 애초에 공산 ‘진영’에 있었을 뿐 공산주의 ‘이념’의 전사였던 적은 없었던 기수에게는 극복해야 할 내부 모순이랄 게 없다. 영화가 애초에 이념에 발을 들인 적 없는 인물을 따라 가니, 주인공이 꿈이냐 이념이냐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불행한 상황에 처하게 된 순간 그가 경험하는 고뇌의 폭이 대폭 좁아질 수밖에 없다. 인물의 내면적 모순 대신 외부의 조건만이 문제가 되고, 그래서 영화는 곧바로 아무 갈등 없이 ‘빌어먹을 이데올로기’라는 결론으로 달려간다. 한번도 이념을 내면화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이념을 버리는 것에도 아무런 갈등이 없는 것이다.
강형철 감독은 전작인 <써니>에서도 거대 담론에 치여 생략되곤 했던 개인의 서사를 담아내기 위해, 그 거대 담론 자체를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묘사한 전력이 있다. 물론 80년대는 거대 담론만이 중요한 것처럼 구느라 미시 담론은 개인의 사치스러운 욕망인 것처럼 치부하는 경향이 강했던 시절이고, <써니>가 보여준 거대 담론에 대한 냉소는 그러한 과거에 대한 반성적인 태도로서 유의미한 지점이 없진 않았다. 그러나 거대 담론의 ‘어떠한 경향’을 비웃는 것과 ‘거대 담론’ 자체를 비웃는 것은 분명히 다른 일이고, 그 둘을 애써 구분하지 않는 강형철 감독의 의도적인 무심함은 <스윙키즈>에서도 반복된다. <스윙키즈>는 ‘이념에 따라 갈린 진영’과 ‘이념’ 그 자체를 혼용한 탓에, 이념 대결이 빚어낸 비극의 구도를 ‘소박하고 아름다운 개인의 자유’와 ‘폭력적인 거대 담론’의 대결구도로 축약해버린다. 개인 좋아, 이념 나빠. 영화가 담아낼 수 있는 서사의 가능성 또한 같은 수준으로 축소됐다.
영화 '써니'(2011) 속 80년대 데모 장면. 전경과 맞선 시위대의 격렬한 가투는 소녀들의 패싸움을 위한 아이러니컬한 배경으로만 존재한다. 민주화 투사였던 오빠는, 2011년 현재 시점에선 외국인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하는 악덕 사업주가 되어 있을 뿐이다. 거대담론에 대한 강형철의 철저한 냉소.
이러한 구도는 사실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상업 콘텐츠에선 꽤 자주 반복되는 광경이다. 이념 대결을 ‘사실 별 것도 아니었던 것 때문에 서로가 죽고 죽였던 비극’으로 서술함으로써, 자연스레 ‘이념보다 중요한 형제애’, ‘이념보다 중요한 가족의 사랑’, ‘이념보다 중요한 한 민족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구도. 이러한 구도는 정말로 이념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라, 사실 이념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택하는 우회로에 가깝다. 공산진영에 맞서 싸우는 것을 잘못된 일이라고 말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한국의 반공주의에 손을 들어줄 수도 없는 어정쩡한 상황, 현대사의 그 어떤 정치적인 부분도 전 국민적인 합의에 도달해 본 적이 없는 탓에, 정치와 이념에 대해서 어떠한 코멘트를 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상황 말이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2004). 남북의 갈등을 형제애에 빗대어 표현한 작품. 그때에는 이러한 접근이 유효했을지 모르지만, 십수년이 지난 이후에도 이처럼 '이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질문으로 우회하는 것이 옳은 접근일까?
그렇기에 ‘이념의 폭력적인 면모’나 ‘이념에 따라 갈린 진영’의 폭력에 대해 정밀하게 비판을 던지는 대신, 영화는 ‘이념’ 전반을 ‘빌어먹을’ 것으로 싸잡고는 판례(박혜수)의 말을 빌어 “공산주의, 자본주의… 그거만 몰랐으면 안 죽고 안 죽일 수 있었잖아.”라는 도피처로 달아난다. 그 말에 응대하는 잭슨의 말은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당위로 삼아왔던 모범답안에 가깝다. “그래도 너네는 같은 민족이니까 계속 싸우진 않겠지.” 하나의 민족이니, 이념의 차이 정도는 가볍게 넘을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 그런데 정말 거기에서 모든 질문을 멈춰도 좋은가?
자신들의 춤의 제목은 '빌어먹을 이념 따위'라고 말하는 잭슨(자레드 그라임스). 이념이 사람보다 중하냐는 질문은 얼핏 인본주의적인 선언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 질문을 통해 이념에 대한 어떠한 구체적인 코멘트도 하지 않겠다는 의지에 가깝다.
나는 <스윙키즈>의 어떤 순간들을 무척 사랑한다. 전쟁통에서도 강한 생존력을 과시하며 매 순간 당당했던 판례를 사랑한다. 피난길에 헤어져 홀로 남겨진 아내만을 그리워하던 병삼(오정세)을 사랑한다. 춤을 추는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거대해 보였던 잭슨과, 새처럼 허공으로 날아오르던 기수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스윙키즈> 전체를 기꺼운 마음으로 긍정하긴 어려울 것이다. 이래저래 아픈 손가락이다.
영화 '스윙키즈'(2018)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