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에서 로즈 역할을 맡은 베트남계 미국인 배우 켈리 마리 트란은 수많은 사람들의 온라인 폭력에 시달린 바 있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켈리를 싫어하는 이들은 다 저마다의 이유를 주절주절 설명했다. 로즈라는 캐릭터가 지나치게 정치적 공정성만 앞세우느라 민폐 투성이 캐릭터여서 싫었다는 둥, 제작진이 정치적 공정성을 추구하기 위해 억지로 끼워넣은 캐릭터라서 설득력이 없었다는 둥...
솔직히 따져보자. 설득력 없기로는 그 넓은 은하계 안에서 저항군으로 일하는 아시아인 한 명을 찾아보기 어려웠던 <스타워즈> 세계관의 폐쇄성만한 게 없고, 민폐 투성이인 거로는 아나킨한테 도통 믿음을 주지 않아서 애가 엇나가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요다만한 캐릭터가 없으며, 억지 투성이 캐릭터로는 "날 때부터 포스를 타고 난 운명의 아이"여서 사람들이 툭하면 죽어 나가는 포드레이싱을 단번에 우승해버리는 어린 아나킨만한 캐릭터도 없다. 정말 캐릭터가 얄팍하고 설득력이 없어서 배우를 싫어하는 거였으면, 디자인빨 하나 때문에 갑자기 없던 분량이랑 캐릭터를 부여받은 티가 역력한 보바 펫 역할의 제러미 불럭은 지금쯤 가루가 될 때까지 까였어야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로즈만 집요하게 씹어댔다. 사람들은 켈리 마리 트란의 외모가 헐리우드가 요구하는 미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기에 그에게 너그럽지 않았다. 사람들은 켈리 마리 트란이 아시아계라서 그를 만만하게 여겼다. 사람들은 켈리 마리 트란이 여자라서 그를 쉽게 공격했다.
몇 개월 전, 인스타그램에서 집요하게 공격을 당한 켈리 마리 트란은 자신의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삭제하고 오랜 침묵에 들어갔다. <스타워즈> 캐스트와 크루들이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켈리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거나 입장을 표명했지만, 켈리 마리 트란 본인은 말을 아끼고 생각을 골랐다. 그리고 2018년 8월 21일, <뉴욕타임즈>는 오랜 침묵을 깬 켈리 마리 트란의 성명( Kelly Marie Tran: I Won’t Be Marginalized by Online Harassment )을 게재했다.
오랜만에 해보는 번역이라 의역도 많고 오역도 적지 않으리라 예상한다. 참고하며 볼 수 있도록 번역문 아래에 원문 링크를 함께 달아둔다.
켈리 마리 트란 : 나는 온라인 폭력에 밀려나지 않을 것이다.
올해 오스카상 시상식장에 도착한 배우 켈리 마리 트란. 그는 "나는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란 생각에,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다른 사람들이 날 아름답다고 봐줄 때만 아름다운 것이라는 생각에 속아왔다."라고 썼다. 사진: 조단 스트라우스/Invision, via Associated Press
By 켈리 마리 트란
Aug. 21, 2018
편집자의 말: 지난 여름, 켈리 마리 트란은 그를 겨냥한 온라인 폭력에 자신의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삭제했다. 이제 그가 처음으로 솔직한 심경을 말한다.
(사진을 지운 건) 그들의 말 때문이 아니다. 내가 그 말들을 믿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은, 내가 여성이자 유색인종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배웠던 것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나는 그들의 삶과 이야기 속에서 오로지 단역으로만 존재하며, 변두리와 공터가 내게 주어진 자리라는 것 말이다.
그 말들은 내 안 깊숙한 곳의 무언가, 내가 이미 극복했다고 믿었던 감정들을 일깨웠다. 다른 아이들의 놀림에 지쳐 베트남어로 말하는 걸 멈췄던 아홉 살 때의 감정, 혹은 백인 남자친구와 그의 가족과 함께 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내가 완벽한 영어로 식사를 주문하자 여자 종업원이 날 보고 놀라며 "와, 교환학생을 받으시다니, 참 귀엽네요!"라고 외쳤던 열일곱 살 때의 그 감정.
그들의 말은 내가 평생 들어온 얘기를 상기시켰다. 오직 그들과 같지 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타인"이고, 여기에 속하지 않으며, 부족하다는 얘기. 그리고 이제 깨닫는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내가 느낀 그 감정의 정체는 부끄러움이었다. 나를 다른 존재로 만드는 요소들에 대한 부끄러움, 내가 나고 자란 문화에 대한 부끄러움. 그리고 내가 가장 실망스러운 건, 내가 어쨌거나 그런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어떤 이들에겐 그들이 영웅이요 구원자이며, 명백한 천명의 계승자라고 가르쳐 온 세상이, 나에게는 내가 그 사람들의 이야기 속 배경에나 있는 존재라고 가르쳐왔던 것이다. 나는 그들의 손톱을 다듬고, 병명을 진단하고, 그들의 연애사를 돕고, 그리고 어쩌면 가장 아프게도, 그들이 날 구원해주길 기다리는 존재라고.
그리고 오랫동안, 난 그 말을 믿었다.
오직 한 가지 성별의, 한 가지 피부색의, 한 가지 생활양식의 사람이 지닌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 사회가 정성스레 만들어 낸 그 말을, 그 이야기를 나는 믿었다.
그 이야기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쓰여진 규칙들을 내 안에 새겨넣었다. 나의 부모가 남들 발음하기 좋으라고 제 진짜 이름을 버리고 미국식 이름 토니와 케이를 택해야겠다 생각하도록 만든 규칙, 아직도 날 뼛속까지 아프게 하는, 말 그대로 문화를 지워버리는 규칙을.
너무나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나 자신을 책망하기 시작했다. 아, 내가 조금만 더 말랐더라면. 혹은 내가 머리를 길렀더라면. 그리고 가장 처참하게도, 내가 아시안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몇 개월이고 자기혐오의 나선을 굴러 내려갔다. 내 마음 속 가장 깊고 어두운 곳, 내가 나 자신을 찢어 발기고, 그들의 말을 나 자신의 자존보다 우선시 하는 곳을 향해서.
그리고 그 때, 나는 내가 그간 속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내 존재가 타인의 인정이란 한계 안에 제한되어 있다고 믿도록 세뇌당했다. 나는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란 생각에,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다른 사람들이 날 아름답다고 봐줄 때만 아름다운 것이라는 생각에 속아왔다. 모든 이들이 내게 이 말들을 하고 또 했다. 미디어가, 헐리우드가, 내 불안감으로 이윤을 올리는 회사들이. 애초에 그들이 영속시키고 있는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 그들이 생산하는 옷과 화장품과 신발을 사도록 날 조종했다.
그렇다. 난 속고 있었다. 우리 모두 그랬다.
그리고 이 깨달음 속에서 난 다른 종류의 부끄러움을 느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부끄러운 게 아니라 내가 자라온 이 세계가, 남들과 다른 이들을 대하는 이 세계의 태도가 부끄러웠다.
이런 식으로 성장한 사람이 나 하나는 아니다. 이건 백인 우위의 세계에서 유색인이 자라며 겪는 일이고, 여자아이들에게 '너희는 사내아이들에게 매력적으로 비춰질 때에만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가르치는 사회에서 여성이 자라며 겪는 일이다. 이게 내가 자라온 세계다. 하지만 내가 남기고 가고 싶은 세계는 이와 다르다.
나는 유색인 아이들이 그들의 유년기를 백인이 되길 꿈꾸며 허비하지 않는 세계에서 살고 싶다. 나는 여성의 외모가, 언행이, 혹은 그 존재 자체가 집요한 평가의 대상이 되지 않는 세계에서 살고 싶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인종과 종교, 사회경제적 계급, 성적 지향 성 정체성, 장애여부와 상관 없이 그들이 늘 그래왔던 존재, '인간'으로 대우받는 세계에서 살고 싶다.
이것이 내가 살고 싶은 세계이며, 내가 만들기 위해 노력할 세계다.
이것이, 내가 드라마나 영화 대본, 혹은 책을 읽을 때마다 내 머릿 속을 스치는 생각이다. 난 내게 주어진 기회가 매우 드문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나는 이제 내가, 너무 오랫동안 한 가지 이야기만을 맛보아 왔던 세계에, 이야기를 들려주고 보여주고 소화시키는 것을 업으로 삼은 소수의 특권층에 속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니 난 포기하지 않겠다.
당신은 아마 날 '켈리'로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스타워즈> 프랜차이즈에서 주역을 맡은 첫 번째 유색인 여성이다.
나는 <배니티 페어>의 커버를 장식한 첫 번째 아시아인 여성이다.
내 진짜 이름은 로안이다. 그리고 난 이제 겨우 시작했을 뿐이다.
원문: https://www.nytimes.com/2018/08/21/movies/kelly-marie-tran.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