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너무도 황망한 소식으로 잠에서 깼다. 다시 잠이 들었고, 의미를 알 수 없는 꿈 속을 헤매다 다시 눈을 떴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제발 그것만은 아니기를' 바랐던 사인이 밝혀져 있었다. SNS에는 의미 없는 어뷰징 기사들이 둥둥 떠다녔다. 9살 아들은 어떻게 하느냐는 기사를 남발하는 기자들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었다. 평소엔 우리 당 관련된 기사는 한 줄도 안 쓰던 놈들이, 타인의 비극에 피라냐 떼처럼 달라붙어 밥벌이를 하고 있었다.
- - -
나는 그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내가 그와 같은 조직에 몸을 담고 있다는 걸 아주 여러 차례 자랑스럽게 해준 탁월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매달 당비를 밀리지 않고 내는 것뿐이었다. 같은 당원 동지들만큼 뜨거운 온도로 타오르지 못하는 탓에, 바쁘다는 핑계로 당원모임에도 잘 나가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참 가난한 일들 뿐이었던 것이다.
- - -
막내 상주의 얼굴을 보지 않길 바랐다. 볼 자신이 없었으므로. 그러나 그게 어디 마음처럼 되는가. 상주의 얼굴에서 아무 것도 읽지 않으려 애썼지만, 황망한 얼굴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다. 빈소 식당에는 나도 아는 얼굴들이 꽤나 있었지만, 그 얼굴을 보고 나니 오래 앉아 있을 자신이 없어졌다. 부의금을 내고 도망치듯 빈소를 빠져 나왔다. 날이 추웠다. 열 세살에 누나를 잃었던 내겐 그래도 어머니가 있었고, 덕분에 그럭저럭 세상을 건너갈 수 있었다. 아홉에 어머니를 잃은 그가 다치지 않고 세상을 건너가길 바란다.
- - -
고인이 훌쩍 세상을 놓은 이유에 대해 이런 저런 말들이 많다. 나는 아무 것도 추측하지 않고자 한다. 남기는 말 한 마디 없이 떠난 이의 깊은 속까지 가 닿을 자신이 없다. 그저, 명복을 빌 수밖에 없다.
- - -
우리는 그래도 기운을 내자며, 억지로 으쌰으쌰하며, 기어코 노량진에 가서 회를 먹었다. 회는 맛있었고 매운탕도 먹을 만 했지만, 쉽게 넘어가진 않았다. 너무 빨리 배가 불렀고, 너무 빨리 취해버렸다. 보글보글 끓는 매운탕을 남기고 일어나 노량진 수산시장 옥상으로 올라가니, 여의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였다. 그냥, 서러웠다.
- - -
SNS에 그를 추억하는 이들이 그의 사진을 올렸다. 그 사진을 오래 바라볼 자신이 없어서 빨리 손가락으로 스크롤을 내렸다.
- - -
공동장례위원장에 이름을 올리는 건 10만원, 장례위원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1만원. 그의 추모 광고를 내고, 모금액이 남으면 유족을 위해 사용한다고. 한 것도 없는 나 같은 당비셔틀이 '공동장례위원장' 씩이나 되는 건 화가 날 정도로 문턱이 낮은 비용만을 요구했다. 한 달 살이가 조금 빠듯해지겠지만, 핸드폰으로 10만원을 송금했다. 동지라 부를 수 있던 사람을 보내는 길에 10만원도 보태지 못할 거라면, 돈은 벌어서 뭐할 것인가.
- - -
탁월한 대변인이었고, 존경하는 부대표였으며, 우리 세대의 진보정치에 대해 더없이 치열하게 고민하던 이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박은지 동지의 명복을 빈다.
공동장례위원장: 분담금 10만원
장례위원 : 분담금 1만원
계좌 : 우리은행 844-07-071039 정현정
명단 : laborkr@gmail.com
명단마감 : 3월 9일 (일) 오후 5시
문의 : 구형구 조직실장 (010-3664-5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