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너무 정치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오늘은 장안의 화제인 맥도날드 애플파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이게 벌써 20여년 전의 이야기니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뭐 본디 이야기라는 게 출발지점하고 도착지점만 맞으면 메데타시 메데타시 아닌가.
그때가 아마 5학년 때였을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을 했고, 큰누나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그 전까지만 해도 늘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거나 취업을 한 친척들이 한 명씩은 우리 집에서 더부살이를 했으니까, 내 기억 속 우리 집 가족은 최소 여섯 명이었다. 이혼이란 단어 앞에서 어찌 반응하면 좋을지 몰라 안절부절하던 내 친구들과 날 불쌍하게 바라보던 어른들의 우려와는 달리 난 딱히 불행하진 않았다. 뭐, 같이 살 때 행복한 이들이 있듯이 따로 떨어져 살 때 행복한 이들도 있는 거지. 하지만 불과 몇 개월 사이에 한 두 명씩 집을 떠나 엄마와 작은누나, 나 셋만 남게 된 집이 좀 허전하긴 했다.
설상가상, 작은누나가 수술을 위해 어머니와 함께 몇 개월 일정으로 일본으로 떠나게 되며 혼자 남을 내가 문제가 됐다. 아버지가 지척에 살고 계셨으니 영 혼자인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막막한 건 사실이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아버지로선 혼자 회사 일과 살림을 병행하며 혼자 사는 삶을 개척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을 것이고, 나 또한 아버지와 그렇게 살갑게 지내는 착한 아들도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몇 개월씩 집을 비워 아무도 없이 놀리면 집안의 화초부터 수도까지 사람 손을 타야 하는 것들이 허물어질 터, 결국 나는 아버지 집과 우리 집을 오가며 지냈고, 몇몇 친척들이 번갈아가며 어린 나와 집안 살림을 돌보기 위해 집을 찾아와주곤 했다.
돌이켜보면 난 참 말 안 듣는 녀석이었다. 노구를 이끌고 외손자를 돌보러 와주신 외할머니가 차려주신 밥상을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다 보고 먹겠다고 떼를 쓰는 불효를 저지르기도 했고, 아버지 집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나와 아버지의 살림을 돌봐준 사촌누나들에게 슬쩍 용돈을 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그래도 용케 다들 그런 날 인내해 준 덕에 딱히 큰 사고 없이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어쩜 그렇게들 해주었던 걸까. 나였더라면 그 말 안 듣고 지 잘난 줄만 알고 어른인 척 하는 꼬맹이의 머리를 쥐어박아줬을텐데. 넌 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지금부터 이 난리야. 뭐가 되긴, 커서 네가 되려고 그랬지.
그 시절 날 인내해 준 수많은 친척 중 내가 제일 좋아했던 사람은 친가 쪽 사촌인 경희누나였다. 웃으면 젊은 시절의 신애라와 주현미 사이 어디쯤의 인상을 닮았던 누나는 늘 밝고 당찬 사람이었다. 누나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에 능했고, 무슨 이야기를 해도 깊게 공감해줄 줄 아는 재주가 있다. 아버지도 누나를 미더워했고, 어머니도 누나를 좋아했다. 별 일 아닌 것 같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혼해서 따로 살게 된 숙모와 꾸준히 원만한 관계를 가진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어려운 일을 누나는 별 문제 없이 해내곤 했고, 나도 그런 누나가 좋았다.
자형을 만나 가정을 꾸리기 전 누나는 직장생활을 했는데, 그 시기가 딱 내가 돌봐줄 사람을 필요로 하던 시기와 겹쳤다. 그 탓에 누나는 얼마간 나와 함께 사는 삶을 살았다. 저녁 늦게 들어와 어린 사촌동생 뒤치다꺼리를 하는 게 결코 쉽지 않았을텐데도 누나는 늘 웃으며 날 챙겼다. 잠 못 드는 나를 위해 늦은 저녁 주전자에 우유를 데워 코코아를 만들어주기도 했고, 같이 TV를 보며 함께 웃고 떠들기도 했다. 누나의 퇴근을 기다리는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가끔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누나는 내 생각이 나서 샀다며 핸드백에서 간식을 꺼내주곤 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맥도날드 애플파이였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무슨 전후엔 먹을 게 많지 않았노라며 보릿고개를 회상하는 어르신처럼 들리겠지만, 95년~96년 무렵만 해도 근사한 디저트 가게 같은 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지금에야 훨씬 더 먹음직스러운 파이를 파는 집들이 천지에 널려있지만, 그때 난 애플파이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다. 심지어 맥도날드가 집 근처에 생겨 처음 직접 가 본 것도 97년 이후의 일이었고. 그랬으니 누나가 꺼내서 준 애플파이가 어린 내게 어떤 의미였겠나.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가히 천국의 맛이었다. 바삭한 껍질을 베어물면 안에 설탕과 계피를 넣고 졸인 뜨겁고 달고 끈적한 사과필링이 왈칵 쏟아지는데 그게 어찌나 맛있었는지. 난 누나에게 “내일도 퇴근할 때 애플파이 하나만 사주라”라고 조르곤 했다. 물론 누나는 내 부탁을 마다한 적이 없었고.
사랑이 충만했던 날들이었다. 왜 과거형으로 서술했는고 하니, 위에서 내가 들려준 이야기 속에 나오던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이제는 곁에 없기 때문이다. 선천적인 장애와 반복되는 좌절로 서서히 지쳐갔던 작은누나가 먼저 세상을 등졌고,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에 빠진 외손자 때문에 애써 끓인 추어탕이 개다리소반 위에서 식어가는 꼴을 참고 견뎠던 나의 외할머니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고, 경희누나도 세상을 떠났다.
다들 바쁘게 산다고 연락 없이 지내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던 어느 날, 비보가 거짓말처럼 찾아왔다. 암이라고 했다. 늘 밝고 씩씩한 모습만 보여주던 누나는 자신의 투병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고, 수술 후 재활이 잘 되면 그제사 별일 아니었던 것처럼 이야기할 생각이었단다. 하지만 그게 뜻처럼 되지 않았고, 우리는 누나가 세상을 뜨고 난 뒤에야 누나가 아팠음을 알게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자주 연락하고 살 것을. 영정 사진 속 누나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경희누나를 그렇게 보내고 나서 얼마 뒤, 문득 맥도날드에서 오랜만에 애플파이를 사먹어볼까 했던 나는 메뉴에서 애플파이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아니, 그게 왜 사라진 거지? 그 맛있는 걸 대체 왜?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나도 맥도날드에서 애플파이를 안 산지 몇 년은 됐었고, 이미 서울 시내에는 근사한 디저트를 파는 디저트 전문점들이 넘치게 많았다. 누가 굳이 맥도날드 애플파이 같은데 집착을 하겠는가. 경희누나는 세상을 떠났고, 누나와의 추억이 담긴 파이도 판매가 중단됐다. 정작 있을 땐 대수롭지 않았던 것들이 자리를 비우자 지나치게 휑해졌다. 그렇게 어린 시절의 추억 한 조각이 아무 기척도 없이 사라졌다.
몇 해가 지나 다시 올해 11월 4일, 맥도날드 애플파이는 한정판매로 돌아왔다. 다시 먹어본 애플파이는 확실히 좀 조악했다. 맛이 변한 건지, 아니면 내 추억이 장난을 친 건지. 예전엔 그렇게 고소하고 바삭하던 파이껍질은 어딘가 분식집 야끼만두 같은 기름 쩐내를 풍겼고, 사과필링도 예전처럼 달고 맛있지는 않았다. 맥도날드 애플파이가 없던 그 몇 년 사이 나는 이것보다 더 맛있게 애플파이를 만드는 집을 몇 군데 경험했다. 밖에 더 근사한 세계가 있단 걸 알게 된 내게, 다시 돌아온 맥도날드 애플파이의 맛은 그저 딱 1000원짜리 맛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난 커피 한 잔과 애플파이를 시키고 천천히 포장을 벗겨 기름 냄새나는 파이 껍질을 베어문다. 한정판매가 끝나는 날까지 몇 번이고 그 일을 반복할 의향이 있다. 그건, 아마 맥도날드 애플파이를 먹는 게 내겐 사랑이 충만했던 날들을 기억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가 아마 5학년 때였을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을 했고, 큰누나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그 전까지만 해도 늘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거나 취업을 한 친척들이 한 명씩은 우리 집에서 더부살이를 했으니까, 내 기억 속 우리 집 가족은 최소 여섯 명이었다. 이혼이란 단어 앞에서 어찌 반응하면 좋을지 몰라 안절부절하던 내 친구들과 날 불쌍하게 바라보던 어른들의 우려와는 달리 난 딱히 불행하진 않았다. 뭐, 같이 살 때 행복한 이들이 있듯이 따로 떨어져 살 때 행복한 이들도 있는 거지. 하지만 불과 몇 개월 사이에 한 두 명씩 집을 떠나 엄마와 작은누나, 나 셋만 남게 된 집이 좀 허전하긴 했다.
설상가상, 작은누나가 수술을 위해 어머니와 함께 몇 개월 일정으로 일본으로 떠나게 되며 혼자 남을 내가 문제가 됐다. 아버지가 지척에 살고 계셨으니 영 혼자인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막막한 건 사실이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아버지로선 혼자 회사 일과 살림을 병행하며 혼자 사는 삶을 개척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을 것이고, 나 또한 아버지와 그렇게 살갑게 지내는 착한 아들도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몇 개월씩 집을 비워 아무도 없이 놀리면 집안의 화초부터 수도까지 사람 손을 타야 하는 것들이 허물어질 터, 결국 나는 아버지 집과 우리 집을 오가며 지냈고, 몇몇 친척들이 번갈아가며 어린 나와 집안 살림을 돌보기 위해 집을 찾아와주곤 했다.
돌이켜보면 난 참 말 안 듣는 녀석이었다. 노구를 이끌고 외손자를 돌보러 와주신 외할머니가 차려주신 밥상을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다 보고 먹겠다고 떼를 쓰는 불효를 저지르기도 했고, 아버지 집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나와 아버지의 살림을 돌봐준 사촌누나들에게 슬쩍 용돈을 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그래도 용케 다들 그런 날 인내해 준 덕에 딱히 큰 사고 없이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어쩜 그렇게들 해주었던 걸까. 나였더라면 그 말 안 듣고 지 잘난 줄만 알고 어른인 척 하는 꼬맹이의 머리를 쥐어박아줬을텐데. 넌 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지금부터 이 난리야. 뭐가 되긴, 커서 네가 되려고 그랬지.
그 시절 날 인내해 준 수많은 친척 중 내가 제일 좋아했던 사람은 친가 쪽 사촌인 경희누나였다. 웃으면 젊은 시절의 신애라와 주현미 사이 어디쯤의 인상을 닮았던 누나는 늘 밝고 당찬 사람이었다. 누나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에 능했고, 무슨 이야기를 해도 깊게 공감해줄 줄 아는 재주가 있다. 아버지도 누나를 미더워했고, 어머니도 누나를 좋아했다. 별 일 아닌 것 같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혼해서 따로 살게 된 숙모와 꾸준히 원만한 관계를 가진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어려운 일을 누나는 별 문제 없이 해내곤 했고, 나도 그런 누나가 좋았다.
자형을 만나 가정을 꾸리기 전 누나는 직장생활을 했는데, 그 시기가 딱 내가 돌봐줄 사람을 필요로 하던 시기와 겹쳤다. 그 탓에 누나는 얼마간 나와 함께 사는 삶을 살았다. 저녁 늦게 들어와 어린 사촌동생 뒤치다꺼리를 하는 게 결코 쉽지 않았을텐데도 누나는 늘 웃으며 날 챙겼다. 잠 못 드는 나를 위해 늦은 저녁 주전자에 우유를 데워 코코아를 만들어주기도 했고, 같이 TV를 보며 함께 웃고 떠들기도 했다. 누나의 퇴근을 기다리는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가끔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누나는 내 생각이 나서 샀다며 핸드백에서 간식을 꺼내주곤 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맥도날드 애플파이였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무슨 전후엔 먹을 게 많지 않았노라며 보릿고개를 회상하는 어르신처럼 들리겠지만, 95년~96년 무렵만 해도 근사한 디저트 가게 같은 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지금에야 훨씬 더 먹음직스러운 파이를 파는 집들이 천지에 널려있지만, 그때 난 애플파이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다. 심지어 맥도날드가 집 근처에 생겨 처음 직접 가 본 것도 97년 이후의 일이었고. 그랬으니 누나가 꺼내서 준 애플파이가 어린 내게 어떤 의미였겠나.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가히 천국의 맛이었다. 바삭한 껍질을 베어물면 안에 설탕과 계피를 넣고 졸인 뜨겁고 달고 끈적한 사과필링이 왈칵 쏟아지는데 그게 어찌나 맛있었는지. 난 누나에게 “내일도 퇴근할 때 애플파이 하나만 사주라”라고 조르곤 했다. 물론 누나는 내 부탁을 마다한 적이 없었고.
사랑이 충만했던 날들이었다. 왜 과거형으로 서술했는고 하니, 위에서 내가 들려준 이야기 속에 나오던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이제는 곁에 없기 때문이다. 선천적인 장애와 반복되는 좌절로 서서히 지쳐갔던 작은누나가 먼저 세상을 등졌고,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에 빠진 외손자 때문에 애써 끓인 추어탕이 개다리소반 위에서 식어가는 꼴을 참고 견뎠던 나의 외할머니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고, 경희누나도 세상을 떠났다.
다들 바쁘게 산다고 연락 없이 지내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던 어느 날, 비보가 거짓말처럼 찾아왔다. 암이라고 했다. 늘 밝고 씩씩한 모습만 보여주던 누나는 자신의 투병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고, 수술 후 재활이 잘 되면 그제사 별일 아니었던 것처럼 이야기할 생각이었단다. 하지만 그게 뜻처럼 되지 않았고, 우리는 누나가 세상을 뜨고 난 뒤에야 누나가 아팠음을 알게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자주 연락하고 살 것을. 영정 사진 속 누나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경희누나를 그렇게 보내고 나서 얼마 뒤, 문득 맥도날드에서 오랜만에 애플파이를 사먹어볼까 했던 나는 메뉴에서 애플파이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아니, 그게 왜 사라진 거지? 그 맛있는 걸 대체 왜?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나도 맥도날드에서 애플파이를 안 산지 몇 년은 됐었고, 이미 서울 시내에는 근사한 디저트를 파는 디저트 전문점들이 넘치게 많았다. 누가 굳이 맥도날드 애플파이 같은데 집착을 하겠는가. 경희누나는 세상을 떠났고, 누나와의 추억이 담긴 파이도 판매가 중단됐다. 정작 있을 땐 대수롭지 않았던 것들이 자리를 비우자 지나치게 휑해졌다. 그렇게 어린 시절의 추억 한 조각이 아무 기척도 없이 사라졌다.
몇 해가 지나 다시 올해 11월 4일, 맥도날드 애플파이는 한정판매로 돌아왔다. 다시 먹어본 애플파이는 확실히 좀 조악했다. 맛이 변한 건지, 아니면 내 추억이 장난을 친 건지. 예전엔 그렇게 고소하고 바삭하던 파이껍질은 어딘가 분식집 야끼만두 같은 기름 쩐내를 풍겼고, 사과필링도 예전처럼 달고 맛있지는 않았다. 맥도날드 애플파이가 없던 그 몇 년 사이 나는 이것보다 더 맛있게 애플파이를 만드는 집을 몇 군데 경험했다. 밖에 더 근사한 세계가 있단 걸 알게 된 내게, 다시 돌아온 맥도날드 애플파이의 맛은 그저 딱 1000원짜리 맛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난 커피 한 잔과 애플파이를 시키고 천천히 포장을 벗겨 기름 냄새나는 파이 껍질을 베어문다. 한정판매가 끝나는 날까지 몇 번이고 그 일을 반복할 의향이 있다. 그건, 아마 맥도날드 애플파이를 먹는 게 내겐 사랑이 충만했던 날들을 기억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