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키 시리즈의 외전 격이자 7번째 영화, 처음으로 실베스타 스텔론이 각본에 참여하지 않은 작품인 <크리드>(2015)는 <록키>(1976)와 <록키 발보아>(2006)의 전통을 충실히 따른다. 주인공은 현역 챔피언이 퍼블리시티 스턴트를 위해 이벤트 성으로 여는 경기의 희생 제물로 선택되고, 모두의 만류에도 주인공은 고민 끝에 선뜻 경기 제안을 수락한다. 세상은 그가 마지막 라운드까지 버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주인공은 엉망진창이 되어 가면서도 마지막까지 경기를 마친다. 늘 2:1로 갈린 심판진의 결정에 따라 (split decision!) 승리는 챔피언의 몫이 되고, 대신 주인공은 자신을 무시하던 세상과 챔피언의 존중을 받아낸다. <크리드>의 말미, "to the winner, by split decision..."이라는 대사가 나올 때, 내심 피식하는 걸 참기 어렵다.
비록 <록키> 2편부터 5편에 이르기까지 시리즈의 중간은 패배하지 않고 승리하며 끝나는 - 그리고 록키 발보아에게 자신을 투사한 80년대 미국의 자뻑 - 서사로 채워져 있지만, <록키>를 이야기할 때마다 나는 주인공이 '패배'하는 '해피엔딩'을 기억한다. 왜냐하면, 필라델피아의 가장 가난한 골목에서 코를 찌르는 악취를 견디며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던 이탈리아계 건달 로버트 '록키' 발보아에게 중요한 건 승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록키> 1편, 경기 전날 밤 잠을 못 이루던 록키는 아폴로 크리드와의 경기가 펼쳐질 경기장으로 걸어가본다. 무명인 자신을 그린 포스터는 설상가상 복싱팬츠 색깔조차 잘못 그려져 있고, 그 사실을 지적해도 프로모터는 피식 하며 그게 중요하냐고 되묻는다.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 집으로 돌아온 록키는 연인 에이드리언에게 말한다.
"못 하겠어."
"뭘?"
"이길 거 같지 않아."
"아폴로?"
"그래. 나가서 걸어다니며 생각해 봤어. 그러니까, 말이나 돼? 아예 노는 물이 다른데."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모르겠어."
"훈련 정말 열심히 했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그런 말 하지 마."
"아냐, 에이드리언. 사실이잖아. 내가 뭐라고. 하지만 상관 없어, 알아? 이 경기를 지더라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거든. 맞아서 머리가 깨져도 괜찮아. 난 그냥 끝까지 가보고 싶은 거야. 아무도 아폴로 크리드를 상대로 15회까지 가본 적이 없거든. 만약 내가 마지막 라운드까지 가서, 벨이 울릴 때 두 발로 서 있기만 한다면. 아마 내 생애 처음으로 깨닫게 되겠지, 내가 그냥 동네 건달 나부랭이일 뿐인 건 아니라고."
애초에 록키의 목적은 세계 챔피언을 이겨보려는 게 아니었다. 생애 단 한번 찾아온 말도 안 되는 기회, 모두의 비웃음을 사는 링 위에서 한번이라도 자신의 삶을 증명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한번도 제대로 된 기회를 주지 않았던 세상에, 먹고 살려고 발버둥치는 자신에게 변변한 직업도 없는 건달이라고 손가락질했던 이들에게, 그리고 내심 그런 말들을 제 안에 담아 반복해 되뇌이며 제 자신을 혐오했던 자기 자신에게. 그래서 록키는 다운이 됐음에도 "그냥 누워 있"으라는 코치 미키의 말을 무시하고 일어나고, 절대 수건을 던지지 말라고 당부하고, 경기가 끝난 다음엔 아예 누가 승자인지 따위는 듣지도 않은 채 에이드리언을 찾는다. 내가 해냈다고, 우리가 해냈다고.
그 전통은 아들에게 고난에도 쓰러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삶의 자세를 가르쳐 주고 싶어했던 <록키 발보아>에서도 반복된다. 어차피 한창 때의 세계 챔피언과 맞서서 환갑의 록키가 이길 수 있는 기회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바라는 건 당신은 이제 끝났다고 이야기한 사람들 앞에서 나 아직 살아있다고, 내가 쓰러질 때는 내가 정하는 거라고 입증할 수 있는 기회다. 아들에게 기껏 삶을 권투에 비유해 이야기해줬는데, 자신이 제 다짐처럼 살지 못하면 안 되니까.
'애한테 말해준 게 있잖아. 인생은 얼마나 세게 때릴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고. 얼마나 세게 얻어 맞고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느냐의 문제라고. 주먹을 얼마나 감당해내면서 전진할 수 있느냐의 문제라고.'
록키는 폴리와 아들 로버트와 친구가 된 마리와 마리의 아들 스텝스, 심지어는 과거 무명 시절 자신과 푼돈을 받고 대전하던 스파이더 리코와 함께 웃으며 링을 떠난다. 판정 결과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그의 미소는, 그가 애초에 싸움을 통해 추구한 것이 승리가 아니라 싸움에 임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 물론 모든 것이 끝나고 에이드리언의 묘지를 찾아가 비석 위에 장미꽃을 올려놓으며 "에이드리언, 우리가 해냈어."라고 말하는 건 잊지 않았지만.
그리고 여기 <크리드>가 있다. 아폴로 크리드가 세상을 떠나기 전 불륜으로 남기고 간 자식. 오랜 세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랐고,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난 뒤 아폴로의 아내인 매리 앤이 찾아올 때까지 위탁가정과 소년원을 전전하며 살던 소년. 아버지의 이름에 기댔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서 '아도니스 존슨'으로 살았으나, 도니는 첫 경기를 우승한 다음 날 원치 않은 방식으로 자신이 '아도니스 크리드'라는 사실을 폭로 당한다. 마지막 타이틀 방어전을 꾀하던 세계 챔피언 측은 크리드라는 이름값에 끌려 도니와의 경기를 추진하고, 기자 회견장에서 도니는 '가짜 크리드'라는 상대의 도발을 당한다. 마지막 라운드, 코치로 함께 참여한 록키는 한쪽 눈이 부어올라 시야가 차단된 도니를 말리려 한다. 과거 이반 드라고와의 경기에서 말리지 말라고 만류하던 아폴로를 대신해 타월을 던졌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아 끝내 아폴로가 링 위에서 죽었던 악몽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네 아버지가 멈추지 말라고 했을 때에도 말렸어야 했어. 지금 이 경기는 여기서 멈추마."
"그러지 마요, 네? 끝까지 해볼게요. 증명해야 할 게 있단 말이에요."
"뭘 증명하겠다는 거냐?"
"내가 실수로 태어난 게 아니란 거요."
"봐라. 미키가 죽고 난 뒤에 날 도와준 거에 대해서 아폴로한테 감사할 기회가 없었단다. 하지만 네가 나에게 해준 거에 비하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니지. 넌 내게 다시 싸우는 방법을 알려줬고, 난 집에 돌아가면 이 암이라는 녀석과 제대로 싸워볼까 한다. 하지만 만약 내가 싸운다면, 너도 제대로 싸워야 해. 난 네가 이 링을 가로질러 가서 저 개자식을 때려눕히길 바래. 할 수 있겠냐? 말해봐."
"저 개자식을 때려눕히겠어요."
"응, 안다. 왜인 줄 아니. 왜냐하면 넌 크리드고, 내가 널 사랑하기 때문이지."
"저도 사랑합니다."
싸움에 임할 때 대부분의 우리는 승리를 목적으로 삼는다. 록키 시리즈의 투사들은 조금 다르다. 그들은 링 위에서 무언가를 증명하고, 존중을 쟁취해내는 걸 목적으로 한다. 그것에 비하면, 이기고 지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비록 split decision으로 승패가 갈리겠지만, 세 명의 심판 중 누군가는 당신의 처절한 싸움에, 격렬한 존재 증명에 손을 들어줬단 이야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