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대통령에게 호감을 느끼는 이가 나 하나는 아니겠지만, 내가 이 아저씨한테 가진 애정은 조금은 사적인 것에 가깝다.
카투사 시절 내가 근무하던 미군부대 치과병원 프론트데스크는, 고개를 들면 맞은 편 벽에 걸린 미군 통수권자 공식 초상을 볼 수 있는 자리였다. 불행히도 그 시절 미군 통수권자는 조지 W. 부시였다. (...) 격무에 시달리다가 한숨 돌리려고 고개를 들 때마다 부시와 눈이 마주치는 경험은, 개인 사무실이 있는 장교들과 부사관들, 진료실 안쪽에서 근무하는 다른 사병들은 겪지 않아도 되는 나만의 고통이었다. 물론 한국군 사무실에 갈 때마다 이명박 초상을 봐야 하는 고통에 비하면 경미한 고통이었지만, 부시와의 아이 콘택트도 1년 넘게 하다보니 목에서 신물이 올라오곤 했다. 그래도 어쩌랴,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없는 군인의 신분인 것을.
그래서 나는 부시 사진을 떼어내고 오바마 대통령 공식 초상으로 갈아 끼우던 날의 즐거움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사진 한 장 갈아끼웠는데 괜히 삶의 질이 올라가는 것 같았다니깐.
그가 마지막 백악관 출입기자 초청 만찬 자리에서 던진 농담들 중 인상 깊은 부분들을 번역해봤다. 놀랍게도 작년에 던졌던 농담들보다 수위가 더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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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곡으로 안나 켄드릭의 'When I'm Gone'을 틀면서 입장. 가사가 '내가 가고 나면 당신은 날 그리워할 거예요.'다.) "대놓고 말은 못 하지만, 사실인 거 알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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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저의 마지막 - 그리고 어쩌면 최후일 - 백악관 출입기자 초청 만찬에 서게 된 걸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다들 근사하시네요. 공화정의 최후가 이렇게 근사해 보인 적이 없어요." (도널드 트럼프 관련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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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가 좀 늦은 점 사과드립니다. C.P.T였죠. 아, C.P.T는 "백인은 해선 안 되는 농담"의 줄임말입니다." (C.P.T는 Colored People Time의 줄임말로, 흑인들이 약속시간을 잘 안 지킨다는 고정관념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 식으로 치면 '코리안 타임'과 같은 표현. 빌 드 블라지오 뉴욕 시장이 힐러리 클린턴 지지선언을 늦게 한 것에 대해 변명하며 C.P.T였다고 이야기했다가 물의를 빚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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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오늘 던진 농담이 잘 먹히면, 내년엔 골드만 삭스에서 써먹을 생각입니다. 터브먼도 쏠쏠히 챙기겠죠." (힐러리 클린턴 골드만 삭스 거액 강연료 논란 관련 농담. 터브먼은 최근 20달러 지폐에 새겨질 인물로 선정된 19세기 흑인 인권 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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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저는 청년이었고, 이상주의와 활력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지금 보세요. 반백의 늙은이가 다 되어서는 사망선고 위원회(death panel)나 기다리고 있는 신세입니다." (사라 페일린이 오바마캐어를 도입하면 정부에서 만든 조직이 국민들의 의료보험혜택 여부를 심사할 것이고, 나이가 많은 노인들에 대해서는 살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 그냥 죽으라고 할 것이라며 'death panel'란 단어를 동원해 비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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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힐러리가 제게 새벽 3시에 걸려오는 전화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죠. 요즘엔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나는 통에 어차피 그 시간엔 깨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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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누가 저한테 그러더군요. '대통령 각하, 당신 이제 한 물 갔어요. 이젠 쥐스탱 트루도(캐나다 총리)가 대세죠. 잘 생겼죠, 매력적이죠, 그가 미래라니깐요.' 저는 대답했습니다. '그 쯤 해둬요 쥐스탱.' 분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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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만 절 레임덕 취급하는 게 아닙니다. 심지어 몇몇 해외 정상들도 제 퇴임을 내다보고 있어요. 지난 주엔 조지 왕자가 회담 자리에 목욕 가운을 입고 왔지 뭡니까." (참고로 목욕가운을 입고 나온 영국의 조지 왕자는 올해 한국 나이로 4살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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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기자들까지도 날 떠난다니깐요. 사바나 거트리는 백악관 공보실을 떠나서 <투데이쇼>로 갔죠, 노라 오도넬은 CBS <디스 모닝>을 진행하러 브리핑 룸을 떠났죠. 제이크 태퍼는 CNN으로 가려고 저널리즘을 떠났습니다!" (CNN이 진지한 저널리즘을 수행하지 않는다는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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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희한하게도, 이 모든 난리법석에도 불구하고 제 임기 마지막 해 지지율이 계속 오르고 있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높았던(this high) 때는 제가 전공을 뭘로 할까 결정하려던 때였는데 말이죠." (청년 시절 대마초를 했던 과거 관련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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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이상한 건요, 제가 특별히 뭔가 다른 걸 한 게 없단 겁니다. 그래서 이상한 거에요. 제 스태프들도 여론조사 상승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더군요. 대체 뭐 때문에 이런 건지 알 수가 없다니깐요. (화면에 테드 크루즈와 도널드 트럼프의 사진이 뜬다. 좌중 폭소) 아리송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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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부통령) 조 바이든을 사랑합니다. 정말이에요. 그에게 감사하고 싶습니다. 그의 우정, 그가 해준 조언, 언제나 솔직하게 이야기해준 것,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얼굴에 총질 안 한 것." (부시 시절 부통령 딕 체니가 사냥을 나갔다가 오발 사고로 친구 얼굴에 총질을 해서 거의 죽일 뻔한 적이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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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찬에 참석한 영화 <스포트라이트> 팀을 언급하며) "아시다시피 <스포트라이트>는 영화입니다. 진실을 쫓아 강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만한 자원과 자율성을 지닌 탐사보도 기자들에 대한 영화죠. <스타워즈> 이후 최고의 판타지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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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선거철이죠. 일례로, 오늘 여기 민주당의 빛나는 새 얼굴이 참석해 있습니다. 버니 샌더스씨! 저기 있네요! 버니! 당신은 백만불짜리 얼굴입니다. 혹은 당신이 좀 더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다시 이야기하자면, 27달러씩 3만 7천명이 기부한 것 같이 생겼네요." (버니 샌더스의 캠페인 모금 관련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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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버니 현상'에 놀랐더군요. 특히 그가 젊은이들에게 어필하는 점요. 전 아닙니다. 전 이해해요. 아주 최근에, 한 젊은이가 제게 와서는 자기는 자기 꿈을 가로막고 있는 정치인들에게 질렸다고 하더군요. 꼭 그렇게 말하면 우리가 올해엔 말리아(첫째 딸)가 버닝맨(캘리포니아에서 열리는 히피 문화 축제)에 가도록 허락해주기라도 할 줄 알았나봐요. 그럴 일 없습니다. 버니라면 가게 냅뒀을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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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니, 당신이 나와 거리를 두려고 해서 좀 상처 받았어요. 내 말은, 그게 '동무'(comrade)한테 할 일은 아니죠." (사회주의자 관련 농담. 버니 샌더스는 스스로 '민주적 사회주의자'라 한 바 있고, 오바마 또한 정치적 적대자들로부터 공산주의자라는 비아냥을 듣곤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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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힐러리의 강인함과 현명함, 정책적 유능함을 얼마나 존경하는지는 이미 이야기했죠. 하지만 이건 인정해야 할 게, 힐러리가 젊은 유권자한테 어필하려고 노력하는 게 약간은 막 방금 페이스북에 가입한 여러분 친척 같아 보인다는 겁니다. "디어 아메리카, 내가 '쿡 찌르기' 한 거 받았어? 그거 네 담벼락에 뜨든? 내가 제대로 한 건지 모르겠구나. 사랑한다. 힐러리 이모가." 그렇게 설득력 있진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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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후보 경선의 난장판을 언급하면서) "오늘 저녁 식사 초대에 얽힌 혼란만 봐도 그렇습니다. 손님들께 저녁 메뉴로 스테이크와 생선 중에 뭘 먹고 싶은지 적어서 회신해달라고 부탁했는데, 공화당 여러분 왜 다들 '폴 라이언'이라고 적어서 낸 거죠? 여러분, 그건 선택지에 없어요. 스테이크 아니면 생선이라니깐요. 스테이크도 생선도 마음에 안 드실 순 있습니다. 그래도 그 중에서 고르셔야 해요." (트럼프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공화당 지도부 내에서는, 트럼프가 후보 경선에서 대의원 절반을 확보하지 못한 채로 경선을 승리할 경우 중재전당대회를 개최해 하원의장인 폴 라이언을 선출하자는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 폴 라이언이 기자회견을 열어 본인은 나갈 생각도 없고 후보 지명도 거절할 것이라 말하며 물거품이 되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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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주류는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기엔 국제 정책 경험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공정하게 말하자면, 그는 세계 곳곳에서 온 리더들과 만남을 가지는데 많은 세월을 투자했습니다. 미스 스웨덴이라거나, 미스 아르헨티나라거나, 미스 아제르바이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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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도널드의 경험이 값지게 쓰일 만한 곳도 있습니다. 관타나모 수용소 폐쇄죠. 수변시설을 주저앉히는데 일가견이 있잖습니까." (트럼프 엔터테인먼트 리조트 부도 관련 농담. 부도 난 트럼프 엔터테인먼트 리조트는 현재 아이칸이 인수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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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아직도 여러분들이 링크드인(경력을 올려두는 구인구직 사이트) 친구 신청을 수락해주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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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진지하게 자유 언론이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는 바를 이야기하고 함께 일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고 말한 뒤에) "그런 의미에서, 딱 두 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오바마 아웃" (마이크를 떨어뜨린다. 코비 브라이언트의 은퇴 인사 패러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