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도 교과서 국정화를 이야기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이승만의 국부 추앙을 주장하고, 박정희에 대해서는 과는 이만하면 충분히 이야기했으니 가난을 끝낸 기적의 역사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자고 말하며, 신군부의 집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개중엔 5월 광주 또한 북한의 기획이었다 떠드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 분들에겐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을 '독재자'로 정의한 역사관이 '부끄러운, 자학'사관일지 모르겠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라. 민중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 진짜 쩌는 역사 아닌가?
대한민국 국민들은, 권좌에 앉은 이들이 어떻게든 장기독재의 유혹을 느끼고 그것을 실현에 옮기기 위해 부정선거를 저지를 때,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할 때, 각종 정치공작으로 반대파를 숙청해 나갈 때마다 기어코 일어나서 그 독재를 끝장 낸 사람들이다. 당신을 그 자리에 앉게 할 수 있게 만든 그 권력이,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의 손에서 나온 권력이라고. 그러니까 그렇게 멋대로 쓸 거면 당장 돌려내라고.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일어난 마산 항쟁이, 4월의 서울이 이승만을 쫓아냈다. 유신타도를 외치며 부산과 마산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부마항쟁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수습책을 논의하던 대통령과 그 오른팔은, "캄보디아에선 300만을 죽였다는데 까짓거 우리도 100만 정도는" 운운하며 술잔을 기울이다가 왼팔에게 총을 맞아 죽었다. 80년 5월의 광주는 피로 신군부의 불의를 증거했고, 그 증언을 잊지 않고 싸움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은 87년 6월 서울에서 직선제 개헌의 꽃을 피웠다.
세상에 이렇게 윗대가리 말에 고분고분 안 하고 들고 일어난 시민이 어디 또 있어. 4.19는 동아시아 최초의 시민혁명이었고, 80년 광주의 기록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으며, 87년엔 기어코 직선제를 쟁취해냈다. 이 모든 게 백마 탄 초인이 와서 떠먹여 준 게 아니었다. "저 학생들이 무슨 죄가 있길래 총을 쏘고 때리냐"며 넥타이를 풀고 가게 문을 닫고 나선 장삼이사들이 쟁취해낸 역사다. 빼어나게 용감하고 정의로운 이들이 아니라, 적당히 겁 많고 적당히 비겁하고 적당히 속물인 이들이 "그래도 이건 아니지"라며 일어나 쟁취해낸 역사다. 이들이, 우리가, 우리의 선배들이, 온몸으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를 증명해 온 역사다. 이 얼마나 자랑스럽나.
3.15 부정선거규탄 마산의거에서 희생된 시민과 학생들의 피에 책임을 지고 하야하라며 거리로 나선 백발의 노인들. 역사 속에 이름 한 줄 안 올라간 이들이 만들어간 것이 대한민국의 역사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북한을 동경하게 만들어? 누가? 김일성 일가가 3대 세습을 하는 동안 우리는 독재자를 세 번이나 갈아치웠는데? 두 번은 하야시키고 한 번은 아예 세상을 떠나게 만들었는데? 상식이 있으면 우리의 역사가 훨씬 더 자랑스러운 역사 아닌가? 굳이 개발독재의 어둠에 눈 감지 않아도, 한강다리 폭파하면서도 국군이 서울을 지키고 있으니 생업에 종사하라고 거짓말 해놓고선 자기 먼저 피신한 주제에 서울을 수복하자마자 공산당에 부역한 사람들 잡아 죽인다고 칼춤을 추던 노인을 국부라고 추앙하지 않아도, "나한테 당해본 적도 없는 젊은이들이 날 싫어한다"고 느믈거리는 헌정파괴범을 대통령 취급해주지 않아도, 지금 그대로도 대한민국의 역사는 자랑스러울 것 투성이다.
안다. 지금의 한국은 여전히 시궁창이고, 왕년의 민주투사들 중 태반은 꼰대가 되어 우리에게 노오오력을 말하며, 아무리 부정하려해도 헬조선 같아 보이는 기분을 떨쳐낼 수 없다는 걸. 천민자본주의가 극에 달해 빈부격차가 생지옥 수준이고, 중산층이 모조리 몰락하고 있는 이 나라가 암울해 보인다는 걸. 그래도, 그거라도 우리 손으로 싸워 쟁취해낸 시궁창이라는 사실마저 앗아가지 마라. 난 이 시궁창 같은 역사라도 우리 손으로 쟁취해낸 역사란 사실이 존나 자랑스럽다.
이 시민이, 민주주의의 원칙이 끝끝내 승리해온 역사를, 부끄러운 역사라 부르는 당신은 대체 누구의 편에 서 있길래 이 역사가 부끄러운가? 짐작컨대 민주주의의 편은 아니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