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화를 만든 목적이 아무리 숭고하다고 해서 그것이 영화의 부실한 완성도를 무시할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약속>은 종종 관객들에게 직접 울 시간을 주는 대신 먼저 울어버린다. 대사로 설명하고, 배우가 먼저 울고, 배경음악이 성급하게 감정을 고조시키려 든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쓸쓸한 등에 주목해도 좋을 법한 장면에서, 영화는 편집으로 죽은 딸의 눈을 감기는 어머니의 모습을 인서트로 넣는다. 영화는 혹시라도 관객이 따라오지 못할까 매 순간 절박해한다. (포장마차에서 박철민이 김규리에게 멍게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과 그 리액션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너무 뻔히 보이는 평면적인 대사와 연기 지도의 한계에 마주한다. 어머니가 딸이 남기고 간 일기를 읽으며 우는 장면은 배경음악 없이 건조하게만 갔어도 충분히 보는 이들의 심경을 건드렸을 법 하지만, 영화는 굳이 감성적인 배경음악으로 관객을 고조시키려 한다.)
영화는 죽음과 같은 적막과 사람들의 불신 속에서 천천히 고립되어 지옥의 세월을 견뎌내야 했을 이들의 잿빛 시간 위에 자꾸만 감정적 클라이막스를 도입하기 위해 애쓴다. 회사에서 아버지를 회유하기 위해 보낸 인사관리팀 직원은 자신의 일을 하는데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냉혈한으로 그려지고, - 그의 계급적 위치를 알려주기 위해 영화는 그가 에이스 크래커를 믹스 커피에 찍어 먹으며 "오랜만에 먹으니 '이런 것'도 맛있네요."라고 말하는 장면을 삽입한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영화로 만드는 과정에서 그 일화는 아껴두는 게 좋았을 거라 생각한다. 모든 순간에 분노를 불러 일으키는 것보다 분노해야 할 지점에 분노를 집중시키는 것이 영화적으론 더 집중력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저 그가 '진성(이라고 쓰고 삼성이라 읽는)'의 비인간성을 혼자 대변하는 뻔한 악역처럼 그려져 있다. - 실제로는 훨씬 더 교묘하고 은밀했을 사측의 압박은 노골적인 악당들의 수작처럼 그려져 있다.
이러한 결과가 나온 이유에 대해, 제작 과정을 다 아는 것이 아닌 이상 함부로 넘겨 짚을 수는 없다. 허나 애써 선의로 추측해보자면, 아마 더 많은 관객에게 보다 친절하게 내용을 설명하는 영화가 되기 위한 선택이지 않았을까 싶다. 다만 그 결과가 그리 신통치는 않다는 점은 이야기해둬야 겠다. 이 영화의 완성도는 단순한 대중영화를 기준으로 해도 그리 높진 않다. 특별히 심각하게 안 좋은 부분은 없지만, 그렇다고 빼어나게 완성된 장면이라 할 것도 별로 없으니 말이다. 해서 난 이 영화의 완성도에 대해 그다지 높은 평가를 주고 싶진 않다.
다만 그럼에도 이 영화가 가지는 몇 가지 미덕이 있다면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변변한 승리의 경험이 없어 염세적이고 시니컬해지기 쉬운 세상에 삼성을 상대로 승리한 경이로운 실화를 관객들과 공유하고 그 지점에서 다시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게 한다는 것, 한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자본인 삼성에 맞서 끝끝내 영화를 완성하고 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개봉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 그리고 그 싸움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싸움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는 것.
영화적 즐거움을 찾기 위해서만 영화를 고른다면, 영화의 완성도만을 놓고 이야기한다면 나는 굳이 이 영화를 추천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단한 영웅이나 지식인이 아닌, 평범한 택시 운전기사와 평범한 시민들이 정치보다 더 강한 자본(대사에도 노골적으로 나오지 않나. "정치는 표면이고 본질은 경제죠, 아버님.")과의 싸움에서 끝내 작은 승리나마 쟁취한 기적과 같은 승리에서 위안을 받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이 영화를 챙겨 보시기를 권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 스크린에 영사되는 고 황유미씨와 그 아버지 황상기씨의 평범하고 투박한 얼굴은, 세상을 바꾸고 싶으나 고단함에 지쳐 주저앉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영화가 건네는 작지만 확고한 희망의 얼굴이다.
영화는 죽음과 같은 적막과 사람들의 불신 속에서 천천히 고립되어 지옥의 세월을 견뎌내야 했을 이들의 잿빛 시간 위에 자꾸만 감정적 클라이막스를 도입하기 위해 애쓴다. 회사에서 아버지를 회유하기 위해 보낸 인사관리팀 직원은 자신의 일을 하는데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냉혈한으로 그려지고, - 그의 계급적 위치를 알려주기 위해 영화는 그가 에이스 크래커를 믹스 커피에 찍어 먹으며 "오랜만에 먹으니 '이런 것'도 맛있네요."라고 말하는 장면을 삽입한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영화로 만드는 과정에서 그 일화는 아껴두는 게 좋았을 거라 생각한다. 모든 순간에 분노를 불러 일으키는 것보다 분노해야 할 지점에 분노를 집중시키는 것이 영화적으론 더 집중력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저 그가 '진성(이라고 쓰고 삼성이라 읽는)'의 비인간성을 혼자 대변하는 뻔한 악역처럼 그려져 있다. - 실제로는 훨씬 더 교묘하고 은밀했을 사측의 압박은 노골적인 악당들의 수작처럼 그려져 있다.
이러한 결과가 나온 이유에 대해, 제작 과정을 다 아는 것이 아닌 이상 함부로 넘겨 짚을 수는 없다. 허나 애써 선의로 추측해보자면, 아마 더 많은 관객에게 보다 친절하게 내용을 설명하는 영화가 되기 위한 선택이지 않았을까 싶다. 다만 그 결과가 그리 신통치는 않다는 점은 이야기해둬야 겠다. 이 영화의 완성도는 단순한 대중영화를 기준으로 해도 그리 높진 않다. 특별히 심각하게 안 좋은 부분은 없지만, 그렇다고 빼어나게 완성된 장면이라 할 것도 별로 없으니 말이다. 해서 난 이 영화의 완성도에 대해 그다지 높은 평가를 주고 싶진 않다.
다만 그럼에도 이 영화가 가지는 몇 가지 미덕이 있다면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변변한 승리의 경험이 없어 염세적이고 시니컬해지기 쉬운 세상에 삼성을 상대로 승리한 경이로운 실화를 관객들과 공유하고 그 지점에서 다시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게 한다는 것, 한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자본인 삼성에 맞서 끝끝내 영화를 완성하고 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개봉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 그리고 그 싸움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싸움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는 것.
영화적 즐거움을 찾기 위해서만 영화를 고른다면, 영화의 완성도만을 놓고 이야기한다면 나는 굳이 이 영화를 추천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단한 영웅이나 지식인이 아닌, 평범한 택시 운전기사와 평범한 시민들이 정치보다 더 강한 자본(대사에도 노골적으로 나오지 않나. "정치는 표면이고 본질은 경제죠, 아버님.")과의 싸움에서 끝내 작은 승리나마 쟁취한 기적과 같은 승리에서 위안을 받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이 영화를 챙겨 보시기를 권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 스크린에 영사되는 고 황유미씨와 그 아버지 황상기씨의 평범하고 투박한 얼굴은, 세상을 바꾸고 싶으나 고단함에 지쳐 주저앉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영화가 건네는 작지만 확고한 희망의 얼굴이다.
고(故) 황유미 씨와 부친 황상기 씨.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