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화 이론을 배울 때 제일 기본적으로 배우는 게 편집의 마술이다. 희미한 미소를 짓는 남자의 얼굴 클로즈업이 찍힌 장면 A가 있다. 이 장면 A를 포장된 선물상자가 찍힌 장면 B 뒤에 붙이면 이 웃음은 '선물을 받은/줄 생각을 하는 남자의 기쁨'을 나타낸 게 된다. 그러나 이 장면을 비석이 클로즈업 된 장면 C 뒤에 붙이면 이 웃음은 '슬픔을 억누르며 웃어보이는 남자의 비애'가 된다. 어떤 컷이든 그 커트 하나만으로 단일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맥락에 배치되느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문제가 된 <맥심>의 커버가 그냥 사진 한 장이었다면 그러려니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분노하는 이유를 제대로 알려면 김병옥의 사진이 실린 해당 지면(표지)이 지금껏 주로 남성의 판타지를 구현한 사진에 할애되어 왔다는 맥락의 연장선상 안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여기에 한국의 성범죄율이 그렇게 안심해도 좋을 법한 수치가 아니라는 맥락이 더해지면, 사람들이 대거 분노한 이유를 어느 정도는 추론할 수 있지 않나...? 옹호하는 분들은 이 사진을 애써 이러한 맥락에서 분리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배울 만큼 배우신 분들이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다.
-
2. 물론 예술은 월경을 감행할 수 있다. 예술 작품 안에서 어떠한 범죄 행위가 재연되거나 묘사되어도, 그것을 실제 범죄 행위에 대한 옹호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영리 추구용 잡지 표지의 제 1 목적은 예술 이전에 해당 잡지에 대한 광고다. <맥심>은 '진짜 나쁜 남자' 김병옥이 표지모델로 실린 해당 호를 광고하며 스스로를 '나쁜 남자의 바이블'이라고 칭했다. 자, 이 표지는 예술인가, 광고인가? 스스로 어떤 맥락에 있기를 자처하고 있는가?
-
3. 누군가는 표현의 자유를 이야기한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맥심>뿐 아니라 누구라도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표현할 자유를 지닌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는 그런 표지를 인쇄해서 서점에 뿌려도 그것이 공권력에 의해 회수되거나 갑자기 출판사의 출판 허가가 취소되거나 누군가 잡혀가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걸 의미하는 거지, 공론의 장에서 벌어지는 호오에 대한 토론과 비판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전자의 자유에 대한 반대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제일 먼저 그에 대해 반대할 것이다. 슬픈 일이지만, 표현의 자유는 가장 역겹고 저열한 수준의 표현을 옹호하는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 역겨움과 저열함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도구는 활발한 토론이고, 그게 바로 우리가 피곤함을 무릅쓰고 매번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이유다.)
-
4.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여성들 중 데이트 폭력이나 성폭력 피해 등의 경험을 가진 이들이 꽤 많다는 것"에는 대단한 비밀이 숨어 있지 않다. 데이트 폭력을 '사소한 다툼과 몸싸움'이 아니라 '데이트 폭력'이라고 인지하고 나아가 그걸 증언하는 이들이 워낙 적은 나라라서 그렇다. 성폭력 피해의 경험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여성들 중에서도 그런 이들이 많다는 것에 식겁해야지 대체 무슨 소리야...
많은 비장애인들이 한국은 장애인 비율이 낮은 나라라고 착각하고 있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장애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평소에 별 신경을 안 쓰고들 산다.) 왜냐하면 한국의 많은 건물과 도로들, 대중교통은 비장애인 우선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밖으로 나오는 것 자체가 모험인 일이 많기 때문이다.
당신 눈에 안 보인다고, 당신이 잘 모르겠다고 해서 없는 게 아니다.
-
5. "여성주의는 이 땅에서 이미 그 소명을 다한 이론이다. 여성운동이 필요한 곳이 있다면 여자가 운전만 해도 불법이고 아직도 명예 살인이 행해지는 그런 나라들일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한국은 여전히 성추행 내지는 성폭행에 대한 책임의 일부를 피해자에게도 묻는 나라다. "짧은 치마를 입고 계단을 오를 때는 핸드백 등으로 뒤를 가리시라"거나 "밤 늦은 시간 귀가할 땐 아빠나 오빠, 남동생 등의 친지에게 마중을 나와달라고 하라" 같은 조언이 지하철 역에 붙어있는 나라다. 최근엔 초중고등학교 성교육 교안에 '남자는 본능의 동물이라 성욕을 참을 수 없다'거나, '남자가 데이트 비용을 많이 내다보다면 잠자리를 요구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가르치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는 기사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국은 OECD가 남녀 임금 격차를 조사하기 시작한 2000년부터 2012년까지 13년 연속 남녀임금격차 OECD 1위 국가였으며, 2014년 8월 4일자 OECD 자료에 따르면 2012년 한국의 남녀 임금 격차는 37.4%였다. 남자가 100만원을 받는 동안 여자는 62만 6천원을 받는다.
-
안 그래도 페이스북에서 영화 씩이나 공부하셨다는 분이 김기덕을 들먹이며 애써 문제가 된 표지를 맥락에서 분리하려고 노력하시길래 뭐라도 더 길게 쓸까 했는데, 하필이면 그 와중에 갑툭튀해서 "여성주의는 그 시효를 다 했다"라고 이야기하신 분이 여자분이신지라, 내가 뭔가 길게 길게 글을 쓰면 모양새가 꼭 맨스플레인 같아진다는 게 곤혹스러워서 짧게만 썼다. 허나 배움에는 때가 없으며 누구든 모르는 게 있거든 배울 일이다. 두 분 다 늦지 않았다. 진짜로....
-
(페이스북에 8월 23일 올린 글을 블로그에 갈무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