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오늘(8월 8일)이 세계 고양이의 날이라는 글을 보고는 불현듯 오늘 집을 나서기 전에 애들에게 저지른 일들이 생각났다.
- 저지른 일-
내 동거묘 얼룩이는 길냥이 출신인데, 허겁지겁 먹어 버릇한 게 아직도 안 고쳐져서 그런지, 가끔 급하게 먹은 게 얹혀서 토해버리곤 한다. 한 군데에서 진득하게 토하면 치우는 입장에선 편하고 좋은데, 여기 조금 토해놓고는 뻘쭘해하며 저기로 이동해서는 저기에 또 조금 토해놓고(....) 그런다. 방바닥에 토하면 치우기 편한데, 홈이 깊게 파인 창틀 위에서나 침대 위에서 토하면 진심 답이 없다.
오늘도 이 자식이 거하게 잡숫고는 여기 저기에 씐나게 토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얘 잘못이라고 할 순 없는 노릇이니 묵묵히 치웠는데, 그래놓고는 사료를 더 달라고 징징거리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버럭 소리를 지르고 짜증을 내곤 집에서 나왔다.
- 저지른 일 끝 -
아니, 애들에게 화를 내더라도 세계 고양이의 날만큼은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 후회와 참회의 마음으로 시계를 봤더니 11시 30분. 아직까지 집에 달려가면 애들에게 캔사료를 따서 별식을 챙겨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급하게 짐을 싸서 아이들에게로 달려갔다.
집에 가는 길, 수상쩍은 길냥이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회색 페르시안 고양이가 누군가 따놓은 캔사료를 혼자 쳐묵쳐묵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는데, 길을 잃은 놈이라고 보기엔 너무 태연하지만서도 길에서 사는 놈이라고 보기엔 너무 깨끗했던 게다.
주황색 원 안이 문제의 고양이였다.
서둘러 들어가는 길이었기도 하고, 이상하게 당당한 아이의 태도가 걸려서 '그냥 길냥이겠거니'하고 움직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좀 미심쩍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를 했더니 친구는 아주 기본적인 것을 물어보았다.
"걔 목걸이 했디? 확인해 봐."
그래, 그 간단한 걸 왜 확인을 안 했단 말인가. 나는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 녀석에게 접근했다. 과연, 사람이 코 앞까지 와도 도망가지 않는 걸 보니 길냥이는 아닌 것 같았다. 털 사이에 파묻힌 목걸이를 찾아서 뒤져보니 '장군이'라는 이름과 주인의 전화번호가 새겨진 팬던트가 나오더만.
주인에게 전화를 하려고 팬던트를 더 가까이 보려 접근하자, 장군이는 자신의 목 주변을 뒤적뒤적거리는 낯선 인간 남캐에 놀라 도주를 시도했다. 다급한 마음에 아이를 살짝 들어 원래 있던 자리에 조용히 앉혀뒀는데, 안고 있을 때는 살짝 놀라 저항을 안 하던 장군이는 내가 내려놓기가 무섭게 "뭐하는 짓거리야" 하는 듯한 표정으로 내 손목을 물고는 시무룩해 했다. (....) 당연히 아이가 진심으로 문 것이기 때문에 내 손목엔 경미한 상처가 났고 피가 흐르기 시작. ㅠㅠ
두 번의 전화 끝에 주인과 연락이 닿았다. 그 동네 주택가에 살다가 이틀 전에 근처 아파트로 이사했는데, 주택가에 살면서 마실냥이가 된 녀석이 '이사'라는 급격한 상황변화에 적응하지 못해서 엇갈렸다는 설명.
주인이 데리러 갔을 때까지 귀가 안 하고 있었으면 가능한 이야기다 싶었다. 자기는 늘 하던 대로 귀가를 했는데 갑자기 짐이 다 빠져있고.... 그러면 일단 다시 마실을 나가겠지. "한 바퀴 둘러보고 돌아오면 있으려나"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마실냥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길냥이 사료를 혼자 아도치던 그 당당한 태도도 대충은 이해가 갔다. 한 두번 먹어본 솜씨가 아니더만.
아무튼 그건 그거고, 2~3분 내로 오겠다는 주인의 설명에 나는 "그 사이에 애가 다시 이동할 수도 있으니 일단 제가 지켜보고 있겠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자마자 장군이는 성큼성큼 걸어 나에게서 15m 정도 안전거리를 확보했다. 당황한 나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장군이를 당황시키지 않을 만한 속도로 처어어어어어어언천히 다가갔다.
그러나 녀석에겐 허락도 없이 자기를 안아올렸던 낯선 인간남캐에겐 마음을 안 주겠다는 단호함이 있어서, 급기야는 원래 있던 건물과 옆 건물을 구분하는 화단을 뛰어넘어 옆 건물 주차장으로 이동해 버리더라. (....) 졸지에 나는 스마트폰 플래시를 켜고 장군이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함께 화단을 넘었는데 그 비주얼이 어쩐지 도둑놈 같고 막....
아무튼 그렇게 어정쩡한 대치상태를 거듭하고 있으니 곧 주인이 달려왔다. 내가 지 주인과 인사하자, 나와 15m 거리를 두고 길바닥에 누워있던 장군이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주인을 보고는 무척 반가워하더니, 내 얼굴을 보고는 "뭐야, 둘이 아는 사이였어? 그러면 진작에 그렇다고 말을 하지." 싶은 표정이 된 것이었다. (...)
자기 나름대로 상황을 파악한 녀석은 도도도도 달려와서 지 엄마한테 반갑다는 표시를 한 다음,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내 다리에 지 몸을 부비기 시작했다. (....) 적극적으로 친밀감을 표현함으로써 아까 물어서 피 나게 한 걸 어떻게든 만회해보려는 번개 같은 태세 전환이라고 해석할 수 있었는데, 급기야 발라당 누워 내게 배를 보여주고 쓰다듬게 해준 것으로 미루어보아 장군이는 사회생활이 뭔지 잘 아는 고양이 같았다.
그렇게 모자상봉을 잘 주선해주고 자리를 뜨면서 시계를 보니 이미 0시 15분. 나는 세계 고양이의 날을 맞이해 정작 내 고양이들에게는 성깔을 있는 대로 부리고, 남의 집 고양이 모자상봉을 주선해주다가 물려서 피가 난 남자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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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 이야기 1. 주인은 장군이가 혼자 길냥이 사료를 아도쳤다는 내 설명을 듣고는 아주 불안한 눈빛으로 "혹시 어떤 사료였나요..."라고 물어봤다. 역시 뉘 집 부모든 제 새끼 입에 애먼 음식 들어간 건 아닌가 걱정하는 건 똑같다.
뒷 이야기 2. 공중화장실에서 상처부위를 씻고, 들고다니는 항생제 연고로 상처부위에 치덕치덕 발라서 상처를 마무리했다. 덧날 만큼 깊은 상처는 아니니 오케이.
뒷 이야기 3. 집에 들어온 나는 아이들에게 뒤늦게 세계 고양이의 날을 기념하며 캔사료를 따줬다.... 물론 늘 토하는 녀석은 이번에도 급하고 거하게 잘 잡숫고는 세 차례에 걸쳐서 다 토했다. (....) 그래서 결국 다시 그냥 건사료를 더 주고 쓰다듬어 주는 것으로 늦은 세계 고양이의 날 기념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