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뼛속까지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안 좋은 습성이 배인 사람이라, 불과 10여년전까지만 해도 맨스플레인을 밥 먹듯 하곤 했다. 음, 맨스플레인이라기보단 그냥 만인에 대한 훈장질이라고 해두는 게 정확할 거다. 남성보다 여성에게 특별히 더 설명질을 했던 건 아니고, 여성이기 때문에 잘 모를 거라 생각했던 것도 아니니까. 사실 그냥 '나님이 쫌 잘났'기 때문에(...) 성별을 막론하고 상대를 무시한 것에 가깝다. 겉으로는 늘 겸손한 척 했지만, 본심은 저따위였다. 와, 이렇게 쓰고 나니까 그 시절의 나를 찾아가 무진장 때려주고 싶구만.
봐! 온 세상에 맨스플레인이 가득해...! Infinity and beyond!!
그 어두운 기억을 굳이 파헤치고 들어가 구체적인 실제 사례를 기록해 모두의 눈쌀을 찌푸리게 만들 생각은 없으나, 언젠가 누가 "저 새끼 옛날에 나에게 '블라블라블라'라고 맨스플레인 해댔는데."라고 말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건 적지 않은 확률로 진실일 것이란 것 정도는 이야기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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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여년 간 어떠한 계기들 - 반복적인 영상원 입학 실패, 나 글 좀 쓰나봐 싶었는데 특채로 채용되고 보니 좌우 옆자리가 각각 위근우/최지은이고 앞자리는 강명석이어서 멘붕했던 근무환경, <국민저널> 후배들을 도와주러 들어갔는데 정작 많은 순간 그 친구들이 날 보좌해줬던 상황 - 을 거치며 자존심이 와장창 깨졌다. 덕분에 "아, 나란 놈은 그저 파오후 쿰척쿰척 공기나 먹는 안여돼일 뿐이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었고, 그 결과 "내가 Z나 틀렸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디폴트로 탑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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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졸문이나 쓰고"라고 이야기하거나 "전 잘 모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건 괜히 겸손이나 떨자는 의도나 책임으로부터 달아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건 아니다. 그저 내가 잘난 척 하기 시작하면 얼마나 심하게 할 수 있는 인간인지 알고 있어서, 그리고 나보다 훌륭한 분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히 많다는 걸 알고 있어서 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늘 겸손할 것을, 제 분수를 알 것을 스스로에게 강제하지 않으면, 뭐 망하겠지. 10여년 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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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한 회사에 아주 크게 실망한 일이 있었다. 간부 한 분이 해당 회사에 취업을 지망하는 학생들을 모아놓고 '격려의 말씀'을 해주다 말고 갑자기 학벌 문제와 취업 현실을 들먹이며 학생들에게 현재의 대학에 다니고 있는 까닭은 그들이 치열하게 공부하지 않고 놀았던 결과이지 않느냐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물론 수많은 직원들이 일하는 회사면 당연히 개중 한 두명 이상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 한 명으로 회사 전체를 판단해선 안 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사람을 요직에 앉혀 간부까지 올린 회사라면, 진보적 가치를 이야기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해당 회사 제품 불매는 그에 대한 최소한의 항의였다.
나는 그 회사에 전화를 걸어 차분하게 "귀사의 간부께서 귀사에 입사를 희망하는 학생들 앞에서 학벌 차별적인 발언을 공공연하게 하셨는데, 진보적 가치를 추구해 나간다는 귀사라면 응당 그래선 안 되는 것 아니냐. 죄송하지만 귀사 제품을 계속 사용할 수 없다. 넣지 말아달라."고 설명했다. (상담원에겐 죄가 없으니 화를 내지 않았다.)
상담원은 내 이야기를 쭉 듣고는 정중하게 "우선 저희 회사가 고객님께 안겨드린 실망감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말씀처럼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상부에 이 건을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응대를 해준 다음, 신속하게 제품 사용을 해지해줬다. 응대는 정중했고 해지는 칼 같았다.
아직도 해당 회사를 보면 기분이 묘하다. 아주 오랫동안 좋아했던 회사지만, 여전히 그 간부를 생각하면 기분이 아주 안 좋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가 그 회사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을 유지할 수 있는 건, 해지를 할 때 구질구질하게 붙잡거나 "오냐 잘 가라"는 식으로 응대한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해 예를 갖추려고 했던 그 전화상담원의 기억 덕이다.
방금 페친 중 한 분이 올린 글을 보니 "인류보편의 가치인 인권과 문화다양성을 보호하며 개혁과 변화의 가치를 존중하는 지성인과 민주시민의 진정한 벗"을 자처하는 모 매체가 해지 신청을 몇 번 째 받아들이지 않았단다. 항의 전화를 했더니 담당자는 취조하듯 따져 물으며 설전을 벌였고, 급기야 '싸가지' 운운하며 '너 몇 살이야' 라는 말까지 나왔단다. 원문엔 더 원색적인 이야기도 있었지만, 원문을 쓰신 페친분께서 친구공개로 글을 적으셨으니, 더 이상의 디테일은 옮기지 않겠다. (이 글은 해당 페친분의 허락을 받고 쓴 글이다.)
이별에도 최소한의 예라는 게 있다. 그리고 그건 진보니 보수니 개혁이니 민주를 이야기하기 전에 갖춰야 할,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다. 진보를 백 날 떠들어봐야 뭐하나, 예를 갖춰 사람을 대하는 법도 모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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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란 영역에서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이 B란 영역에서 몹쓸 일을 하며 사는 일들이 드물지 않다. 나 또한 그러고 살고 있을 것이다. A에서의 공이 B에서의 과로 무위가 된다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A에서의 공이 있으니 B에서의 과조차 덮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물론 세상 일은 이니셜이 아니라서 그렇게 무 자르듯이 똑 잘려지는 건 아니라는 게 모든 괴로움의 시작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