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한씨, 페이스북에 <한겨레> 토요판 페이지가 생기거든요. 글 좀 써줄 수 있어요?
6월의 어느 날이었다. 어쩌다가 불려 나간 회식 자리, 옆자리에 앉아있던 토요판 고나무 기자가 뜬금없는 부탁을 했다.
- 무슨 글이요?
- 아뇨, 별 건 아니고. 그냥 페이지 좋아요 눌러주시고. 이러이러한 페이지가 생겼으니 많이들 보시라 뭐 이런 글 좀…
- 아니지. 그게 아니라 토요판 페이지에 실을 만한 글을 좀 길게 써달라고 부탁해야지.
느슨하게 흘러가던 대화에 고경태 편집장이 끼어들었다. 말하자면 페이지 개설을 했으니 축전을 달라는 이야기였구나. 나는 젓가락질을 멈추고 물었다.
- 200자 원고지 몇 장 분량에 고료는 얼마 쳐주실 건데요?
물론 농담이었다. 기껏해야 축전인데, 그거 한 편 공으로 써주는 게 뭐 그리 대수겠는가. 낄낄 웃으며 멈춘 젓가락을 다시 놀려 육전을 집어 먹다가 문득 생각했다. 아, 내가 방금 농담 따먹기를 했던 사람들이 창간부터 지금까지 4년째 매번 마감 시간을 어기는 필자를 단 한 번의 폭발도 없이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온 토요판 사람들이었지.
2011년 말의 나는 여러모로 위기에 처해 있었다. 내 적성에 기자라는 직업이 썩 맞지 않는다는 걸 비슷한 시기에 눈치챈 나와 나의 전 직장은, 암묵적인 공감대 속에서 내 퇴사에 합의했다. 평화로운 사직이었으나 사직 후의 삶까지 평화롭진 않았다. 황야의 프리랜서로 돌아온 나를 굳이 찾는 지면은 별로 없었고, 정신 차리고 보니 서른을 코앞에 두게 된 나는 앞으로 뭘 해먹고 살아야 하나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
그 무렵이었다. 훗날 정수장학회 관련 보도로 법정 공방을 벌이며 유명인사가 되는 최성진 기자가 연락을 해왔다. <한겨레>에서 토요판이라는 걸 만드는데 필자로 섭외하고 싶다고. 고경태 토요판 편집장이 승한씨를 강력 추천했다고. 아, 기억하고 있었구나.
고경태 편집장과는 2010년 초 모처에서 칼럼을 연재하면서 리플란에서 인사를 주고받았던 인연이었다. 그는 나와 같은 요일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었으며, “우와! 고경태씨다!”라며 반가운 마음에 리플을 단 내게 젠틀하게 “저도 글 잘 읽고 있습니다”라는 리플로 화답해 주었다. 그냥 예의상 던진 말인 줄 알았는데, 그는 그 해 창간한 <한겨레> 팀 블로그 ‘HOOK’의 필자로 날 섭외했다. (안타깝지만 ‘HOOK’은 지금 시원하게 망해서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나, 그때 내가 썼던 졸고들의 흔적이 사라졌다는 점 하나만큼은 다행이다.)
내겐 분에 넘치는 지면이었던 ‘야! 한국사회’ 필진으로까지 날 추천했던 고경태 편집장이었지만, 같은 해 9월 내가 회사에 입사하면서 칼럼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상황이 이상하게 꼬여 제대로 된 사과도 하지 못했던 탓에 그렇게 인연이 끊길 줄만 알았다. 그러나 고경태 편집장은 날 잊지 않고 찾아주었다.
그렇게 토요판과 나의 인연이 시작됐다. 처음엔 200자 원고지 7장짜리 칼럼 ‘이승한의 몰아보기’로 시작했다. 주말에 집에서 편하게 볼만한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코너였는데, 어느 순간 한계가 왔다. 매번 프로그램 이야기만 하다보니 슬슬 “주말 하이라이트” 코너와 딱히 다를 것도 없어진 데다가, 보도자료 한 장도 받지 못한 채 편성표만 뒤적이는 프리랜서로선 매번 새로운 프로그램을 소개하기 어려웠던 게다. 매번 이 프로그램을 봐야 하는 당위를 진지하게 설명하자니 뭔가 후보 출마의 변을 쓰는 기분 같기도 하고.
이래선 안 되겠다 싶었던 나는 꾀를 하나 짜냈다. 수상스러울 정도로 나를 닮은 글쟁이 “양평동 이씨”라는 3인칭 화자를 등장시켜서 한 편의 꽁트 같은 내용으로 채워보자는 아이디어였다. 주변 실존 인물들과의 대화에다가 MSG를 잔뜩 쳐서 만담을 한 편 짜내고, 그거로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의의를 대충 설명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런데 토요판 사람들이 이 허접스러운 아이디어를 받아줄까? 토요판 사람들도 제정신은 아니었는지, 나의 그 정신 나간 아이디어를 적극 수용해줬다.
어디 그뿐이랴. ‘이승한의 몰아보기’를 1년쯤 연재했을 무렵, 토요판은 200자 원고지 7장을 쓰던 애에게 갑자기 20장짜리 칼럼을 써보라고 등을 떠밀어주었다. 비록 칼럼 제목은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정해졌지만 – 하필이면 그 무렵 ‘술탄 오브 더 디스코’의 음악에 푹 빠져있던 최성진 기자가 던진 농담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어떠냐”가 너무 강렬했던 탓에, 정갈한 제목으로 글을 쓰고 싶었던 나의 소박한 꿈은 허공으로 날아갔다. 아직도 업계 사람들이 ‘이승한’하면 <ㅍㅍㅅㅅ> 편집장 이승환과 헷갈리면서도 ‘술탄’하면 대충 알아듣더라. 원망스럽긴 하지만, 그 당시에 최성진 기자가 즐겨 듣던 밴드가 무키무키 만만수가 아니었던 걸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랬으면 대체 내 칼럼 제목을 뭐로 짓게 되었을까. 상상도 하기 싫다. –
갓 서른이 된 외부 필자에게 매주 원고지 20장짜리 지면을 내준 토요판의 파격적인 결정 덕분에 난 분에 넘치는 지면을 3년째 쓰는 호사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한겨레TV <잉여싸롱> 진행도, MBC FM4U <써니의 FM데이트> 게스트 출연도 결국 다 토요판의 추천이나 토요판에서 알게 된 분들의 도움으로 맺게 된 인연이었다.
같이 일했던 사람 중에 안 고마운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 토요판은 특히나 내게 관대했으며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었던 고마운 지면이다. 덕분에 <한겨레> 창간기념일 행사에서 이진순 박사님과 함께 감사패를 받는 말도 안 되는 영광도 얻었고. (토요판 사람들이 너무 바쁜 나머지 “이승한이 토요판 창간 이래 지금까지 단 한 호도 안 쉬고 칼럼을 줬어요” 정도로만 추천사유를 던져준 탓에, 감사패 전달 당시 딱 그 내용으로만 감사의 의의가 설명됐다는 건 이 글을 보는 당신과 나만의 비밀이다. 지레 민망했던 토요판 기자들이 행사 직후 “승한씨, 절대 개근상이어서 이걸 드린 건 아니고요.”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는 것도 외부엔 알려져선 안 될 것이다.)
이렇게 폭로와 디스가 난무하는 축전을 써도 괜찮겠지 싶을 정도로 날 가족처럼 대해줬던 이들, 토요판의 페이스북 페이지가 번영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절대로 내가 6월의 초입 토요판 사람들로부터 향기로운 술과 기름 진 고기를 얻어 먹었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좌측부터. 허재현 기자, 박유리 기자, 박기용 기자, 고경태 편집장, 고나무 기자, 남종영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