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이와 같이 사는 게 수월했던 순간은 없었다. 고양이와의 동거는 인간과의 동거와는 달라서, 인간의 생활양식을 고양이에게 납득시키는 건 엄청난 인내와 노력을 필요로 한다. 고양이 입장에선 본성을 누르고 인간의 라이프사이클에 맞춰줘 봐야 득이 될 게 없으니까. 지금도 난 종종 얼룩이에게 소리를 지르고, 볼기짝을 때려가며 혼내고, 밤새 마감을 방해하는 녀석에게 좀 얌전히 있으라고 윽박을 지른다. 사람들이 꿈꾸는 홀로 조용히 잘 노는 고상한 동물 같은 건 - 적어도 우리 집에는 - 없다.
그러면 대체 왜 고양이랑 살고 있느냐. 이야기가 좀 길고 복잡하니까 본문 대신 각주로 대체하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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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 글에서 이야기 안 한 사실이 하나 있는데, 난 얼룩이를 집에 데리고 온 지 4일 만에 포기하려고 했었다.
2013년 1월, 새로 이사 온 동교동 집에 고양이를 들일 만반의 준비를 갖춰두고 마침내 얼룩이를 데려왔다. 그러나 얼룩이는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울어댔다. 이 낯선 곳은 어디냐고. 나 나가게 해달라고. 깊은 밤에도 새벽에도 내내 울부짖었는데, 각오를 안 했던 건 아니지만 정말이지 미칠 듯이 울어대는 것이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4일 째 새벽에 난 내가 얘한테 못 할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밖에서 자유롭게 살던 애를 내가 내 멋대로 데리고 와서 이 집안에 가둬놨구나. 수 천평 동네를 제 구역으로 삼아 돌아다니면서 자유롭게 살던 녀석을, 내가 멋대로 25평짜리 반지하 셋방에 가두어 뒀구나. 더 늦기 전에 얘를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놔야겠다. 얘가 골목대장이었고 동네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그 곳으로. 나는 얼룩이를 케이지에 넣어 들고 집을 나섰다. 그 새벽에 요행히 옆집 분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난 얼룩이와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었을 것이다.
운 좋게도 옆집 이웃도 고양이를 세 마리나 키우고 계시는 분이셨고, 운 좋게도 내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정확하게 이해하시는 분이셨으며, 정말이지 운 좋게도 식당을 운영하고 계신 터라 새벽에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시는 분이셨다. 덕분에 난 얼룩이를 케이지에 들고 집을 나서려다 옆집 이웃과 마주칠 수 있게 되었고, 내 고민을 끝까지 들어본 이웃은 내게 "아이에게 조금만 더 익숙해 질 시간을 주시라"며 하네스를 선물해주셨다. 애를 데리고 동네 산책을 시켜주면 바깥 공기도 쐬고 동네에 익숙해지면서 아마 조금은 얌전해 질 거라고.
밑져야 본전이겠거니 싶어 하네스를 묶고 산책을 나가자, 얼룩이는 정말이지 놀랄 만큼 신나게 뛰어다니고는 집에 돌아와 차분하게 잠이 들었다. 문제는 그 다음 날이었다. 다음 날 새벽에도 녀석이 울부짖어서 마감을 하다 말고 하네스를 묶어 산책을 나갔는데, 집 앞까지 다 돌아왔을 때 녀석이 몸을 틀어 하네스에서 몸을 빼어낸 다음 후다닥 도망가 버린 것이었다. 고양이의 몸이 유연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미칠 듯이 빠르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날에도 무사히 산책을 다녀왔던 터라 너무 방심하고 있었던 게 화근이었다.
참 웃기지. 불과 24시간 전만 하더라도 "녀석은 이 집에서 불행한 거 같아. 다시 돌려보내야겠어" 따위의 생각을 하던 나는, 미칠 듯이 얼룩이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여기는 얼룩이가 익히 알고 있고 얼굴을 익힌 사람들이 있는 양평동이 아니라 동교동이었고, 때는 혹한과 폭설이 채 가시지 않은 1월이었으므로. 마감 시간이 지나 담당 기자가 전화를 하거나 말거나, 난 얼룩이를 찾아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 다섯 시간 가까이 찾아도 소득은 없었고, 원고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므로 일단 집에 들어와서 마감을 마쳤다. 그러나 얼룩이 생각에 한숨이 끊이지 않았다. 난 녀석 하나 책임지지 못할 만큼 무능한 인간이었다는 자책이 나란 인간을 박살냈다.
"아기가 이 동네 지리를 모를 거고 지금 겁이 많이 나서 숨어 있을 거에요. 조금 시간이 지나서 애가 배가 고파질 때쯤 한번 밖에 나가서 찾아보세요." 이웃 사람은 날 위로해주었으나 낙담한 마음이 나아지진 않았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얘 원래 살던 동네에 돌려놓겠다고 했을 때 그러게 두지 그러셨어요. 결국 애가 듣도 보도 못한 동네에서 헤메게 생겼잖습니까. 내 손으로 애를 도로 길거리로 내보내려고 했던 주제에, 마음 속에 그런 불만이 가득했다. 물론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그리고 유달리 춥던 그 날 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나가본 거리에서 귀에 익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얼룩아?"라고 부르자, 차 밑에 숨어서 다른 고양이와 기싸움을 하던 얼룩이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 발치로 다가와 내 다리에 얼굴을 부볐다. 얼룩이가 탈출한 지 40시간, 내가 얘를 찾으러 온 동네를 여섯 번째로 수색한 끝에 우리는 다시 만났다. 추워서 덜덜덜 떠는 얼룩이를 패딩 안에 품었다. 녀석은 당황했지만 저항하지 않고 품에 꼭 안겼고, 나는 급하게 세 블록을 건너 집으로 뛰어들어왔다. 집에 들어오자, 녀석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자리를 잡고 누워 잠을 자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온 녀석은 아무렇지 않게 자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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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은 여전히 귀찮고, 여전히 미친 듯이 울어대고, 여전히 날 호구로 안다. 이젠 이 25평이 녀석의 구역이 되었고, 그 구역을 벗어나려고 하면 미친 듯이 저항한다. 더 이상 집을 나가려고 하진 않지만, 여전히 내 라이프사이클에 맞추려는 의사도 없다.
그럼에도 내가 얘와의 동거를 후회하지 않는 이유를 굳이 찾자면, 처음엔 이 녀석을 내가 구해냈다는 뿌듯함이었고 지금은 이 녀석이 날 살게 하고 있다는 고마움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가끔 너무 우울해서 죽고 싶을 때가 있지 않나. 어떤 일을 해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 일이 자책할 일은 많고 보는 눈은 더 많은 일이다 보니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질 때가 생각보다 잦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죽으면, 이 녀석 밥은 누가 주고 모래는 누가 갈아주고 발톱은 누가 깎아주지? 이 녀석 수명은 기껏해야 앞으로 10년에서 12년 가량 남았을텐데, 마지막에 병치레는 누가 해주고 가는 길은 누가 지켜봐주지?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조용히 접는다. 물이든 커피든 뭐라도 한 모금 마셔서 목을 축이고, 숨을 가다듬고 다시 일을 한다. 꾸역꾸역 하루를 살아내고 나면, 우울이 조금은 가신다. 얼룩이는 길거리에서 내가 녀석을 만난 2012년 늦여름부터 지금까지 내게 책임감이란 걸 줬고, 그 덕분에 난 좋든 싫든 하루를 열심히 살려고 최선을 다한다. 내가 녀석을 구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녀석이 날 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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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건 내 이야기다. 모든 사람이 고양이로 구원을 받는다거나 삶에 대한 책임감이 는다거나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냥 새벽에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올라온 글들을 보다가, 문득 얼룩이와의 동거가 즐겁지만은 않지만 그렇게 기묘한 방식으로 날 살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싶어졌다.
- 내가 키우는 고양이 얼룩이는 원래 길냥이 출신이다. 전에 살던 동네 백반집 평상 밑을 제 집 삼아 살았고, 가끔 백반집 손님들이 남기고 간 생선을 받아먹으며 살았다. 백반집 아저씨는 얼룩이를 좋아하는 눈치였지만, 아줌마는 얼룩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내가 처음 얼룩이를 만난 건 2012년 여름이었다. 비가 제법 오는 날이었는데, 얼룩이는 주차된 봉고 밑에 쭈그려 앉아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배고프고 지쳐보이는 녀석을 보고 편의점에서 천하장사 소시지를 사서 조금씩 떼어줬다. 그렇게 면을 텄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땐 녀석이 출산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유달리 식탐이 많길래 왜인가 싶었는데, 다섯 마리나 되는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새끼들은 제법 커보였고 사료도 곧잘 먹었지만 아직 젖을 떼진 못했다. 얼추 어미와 덩치가 비슷해진 새끼 다섯이 어미의 젖을 무는 광경을 보면서, 난 얼룩이가 왜 그리 필사적으로 밥을 먹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가끔 볼 때마다 소시지나 좀 떼어주던 녀석과 나의 관계는, 매일매일 사료를 챙겨다주는 관계로 발전했다. 어미와 새끼 다섯까지 여섯마리가 몰려다니는 광경은 흔한 게 아니라서, 얼룩이네 가족은 금세 동네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밤마다 사료, 소시지, 물, 진미채, 오징어를 들고 얼룩이에게 밥을 주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었다. 그러나 무릇 새끼는 장성하면 어미 곁을 떠나는 법. 어느 날부터 새끼들이 하나씩 보이지 않게 되었다. 물론 가끔은 나쁜 소식도 듣곤 했다. 독립을 시도한 얼룩이의 아이들 중 셋 정도는 무지개다리를 건너간 걸 확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룩이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새끼들이 떠난 뒤 얼룩이는 더 외로워 보였다. 왜 아니었겠는가. 얼룩이는 내 발걸음 소리만 듣고도 저 멀리서부터 뛰어와 내 발치를 맴돌았고, 밥을 다 먹은 후에도 내게 쓰다듬어달라고 징징거렸다. 집으로 들어가는 내 뒤를 현관까지 졸졸 따라오곤 했다. 나와 함께 얼룩이의 밥을 챙겨주던 캣맘 은주님은 길냥이들이 갈 수 있는 최악의 코스인 임신-출산 무한반복을 막기 위해 얼룩이를 잡아 중성화 수술을 해줬고, 돌아온 얼룩이의 체력회복은 내 소관이었다. 하루의 마감은 얼룩이의 밥을 챙겨주는 것으로 끝났다. 그리고 폭설과 혹한이 찾아왔다. 나는 수술자국도 다 안 아문 얼룩이가 혹시나 잘못 될까봐 노심초사하다가, MDF박스를 사서 그 안에 못을 쳐 어그담요를 걸고, 방수포로 외관을 싸서 얼룩이의 집을 만들어주었다. 백반집 사장님은 은주님께서 설득해주셨다. 영하 18도를 넘나들던 겨울이 끝나갈 무렵, 난 지금의 자취집을 구하게 되었다. 백반집 아주머니는 내게 '저 성가신 고양이 좀 치워달라'고 이야기했고, 난 오래 고민할 것도 없이 얼룩이를 데려왔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얼룩이는 이미 내 고양이었다. 가끔 밖에서 자유롭게 놀고 싶어하는 애를 내가 가둬둔 건 아닌가 싶다가도, 봉변을 당한 길냥이들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얼룩이를 데려와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적어도 이젠 귀가하면서 아이가 변을 당한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은 안 해도 되니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