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끔 유투브에서 K-Pop reaction 비디오들을 찾아보곤 한다. K-Pop의 팬이거나 K-Pop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이, K-Pop 뮤직비디오들을 보고 실시간으로 반응하는 걸 찍은 영상이다. 당연히 세계 각지의 팬들이 한국 음악에 열광하는 걸 보며 국뽕을 맞자고 하는 짓은 아니다. 오히려 마이클 잭슨이나 휘트니 휴스턴의 뮤직비디오들을 Mtv나 홍콩 Channel V를 통해 보면서 헤벌쭉하던 촌놈이, 갑자기 동향의 문물이 잘 나가는 걸 보면서 얼떨떨해하는 기분에 가깝달까. 한국 사람들은 흔히 이 reactor들이 아이돌 그룹의 뮤직비디오만 소비할 거라 생각하지만, 막상 찾아보면 재미있는 지점들이 많다. 이적이나 윤상의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이들이 K-Pop의 여명을 연 개척자들이야'라고 경의를 바치는 이들도 있고, 조용필의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저 나이에 이렇게 쿨한 뮤비를 만들다니 멋지네'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언제나 그렇듯, 우리 생각보다 네트는 광대하므로.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우리 딴에는 멋있어 보이자고 넣은 상징이나 효과들이 저들 눈에는 엉뚱하게 비춰질 때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식 드라마타이즈 문법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은 화면 위에 던져지는 모든 내용이 다 메인 줄거리와 연결된다고 믿고 어떻게든 스토리를 재조합하려고 노력하곤 하는데, 그러다 보면 상상치도 못한 줄거리로 재해석될 때가 있다. 안무와 드라마타이즈 파트와 큰 의미 없이 집어넣은 상징들을 일일이 구슬꿰듯 하나의 스토리라인으로 정리해내는 이들의 손에 뮤직비디오가 떨어지면, 한국인들이 의도했던 것보다 더 기묘한 내용으로 재해석이 되곤 하는 것이다.
그들이 잘못 해석한다는 이야기라거나, 그들이 이해하기 쉽게 뮤직비디오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게 무슨 수능 언어영역 작품해설도 아니고, 뮤직비디오를 해석하는데 정답이 어디 있겠는가. 난 그저 더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이 한국의 텍스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시야나 사고방식이 더해지면서 우리도 예상치 못한 결론을 얻는다는 점이 재미있을 따름이다. 세계가 우리의 문화나 우리의 코드를 어떤 식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지를 알게 되면, 우리도 '우리끼리 만들고 우리끼리 해석하고 소비하는' 층위에서 벗어나 좀 더 넓은 시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인터넷은 여전히 얕은 지식이 검증되지 않은 채 서가에 꽂혀있는 무허가 도서관이고, 편향된 의견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저잣거리에 가깝다. 하지만 덕분에 우린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한국인들의 코드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소비하는지 실시간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우리'라고 정해놓은 바운더리를 깨기가 더 쉬워졌다는 이야기다.
2. 오늘 저녁에 인터넷에 공개될 <한겨레> 토요판 '술탄 오브 더 티브이'(클릭)에서, 그리고 오늘 아침에 녹음해 이미 공개된 <시사통> '문화통' 코너에서 나는 '우리끼리 보는 건데 뭘'이라는 생각으로 치는 개그의 위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듣는 사람들끼리 듣는 건데 뭘"이라는 마음으로 팟캐스트에서 여성혐오, 소수자 비하 발언을 던졌다가 이제 와서 그걸 수습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옹달샘 트리오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우리끼리 보는 건데 괜찮지 뭘"이라고 생각하고 '시커먼스'나 '사바나의 아침' 같은 코너를 주말 예능에서 봐야 했던 우리의 지난 세기를 복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시커먼스'가 1987년 메가히트를 쳤음에도 1988년 폐지된 진짜 이유는 서울올림픽 때문이었다고 말하자, 한윤형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 전만 하더라도 한국은 섬과 같았잖아요." 맞다. 한국은 사실상 섬이다. 3면이 바다고, 대륙과 붙어 있는 땅은 휴전선에 막혀 올라갈 수가 없으며, 해외여행 자유화가 된 것도 얼마 안 된 나라다. '우리'라고 생각하는 바운더리가 숨막힐 정도로 좁았던 것은, 어쩌면 섬이나 다름 없는 환경에서 폭압적이고 보수적인 문화를 체득하며 살아온 결과일지 모른다. 정말 비판해야 하는 정치인들이나 가진 자들은 놀림의 대상으로 삼기 어렵고, 그래서 후퇴한 곳에서 '우리'가 아닌 상대를 조롱하는 것에 만족한 것이다. '우리끼리 보는 거니까' 인종차별적 개그를 던지고, '우리끼리 하는 말이니까' 장애인을 비하하고, '우리끼리 듣는 거니까' 여성을 대상화하고...
말하자면 "한국 태생의 한국 국적을 보유한, 사회가 권장하는 표준치의 체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못 생기지도 않은, 스트레이트 비장애인 남성"들이라는 가상의 '우리'가 아닌 모든 대상은, 한국 코미디에서 비하의 대상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우리'의 바운더리에서 벗어나는 존재들을 비하해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우리'라는 바운더리가 넓어지면 넓어질 수록, 나와 다른 사람 또한 '우리'의 대상이라고 상상하고 그들을 포함해서 생각할 수록 누군가를 그렇게 쉽고 게으르게 비하하는 농담을 일삼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는 거다.
3. 새누리당 비례대표 이자스민 의원이 새삼 화제다. 그에 대한 흑색선전과 제노포빅한 비방이 난무하는 가운데, <미디어오늘>(클릭)과 <한겨레21>(클릭)이 연이어 좋은 인터뷰 기사를 내줬기 때문이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난 새누리당을 무척이나 싫어하고, 그가 비례대표로 들어간 탓에 당내에서든 지역에서든 유의미한 세력을 키우지 못한 채 거수기 셔틀을 하고 있다는 한계가 무척 화가 나긴 한다. 그러나 그가 만약 서대문구 지역구에 출마한다고 하면, 난 지지하지 않는 정당이라는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 그를 지지할 의사가 있다. 비록 낙선하더라도 이주민이 지역구를 기반으로 출마에 도전했다는 기록이 남는 거고, 당선이 되면 앞으로 좀 더 당내에서 목소리를 낼 만한 기반이 생기는 일일 테니까.
사진: 이자스민 의원실
물론 제1야당이나 진보정당들이 더 많은 마이너리티들을 비례든 지역구든 상관없이 국회 안에 입성시키는 것이 내겐 가장 보기 좋은 그림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시장친화적이며 과거 독재의 원죄를 지닌 정당 안에, 말하자면 위에서 이야기한 협소하디 협소한 '우리'로 완성된 엘리트들의 연대 안에 갑자기 필리핀 출신의 한국인 여성이 지역의 선택을 받아 떡하니 들어간다고 생각해보라. 그건 그거대로 거대한 상징성을 지니는 일 아닌가? 새누리당은 자신들의 보수성을 희석하기 위해 탈북자 출신 의원, 한국노총 출신 의원, 이주민 의원을 원내에 입성시켰지만 그건 죄다 구색 맞추기나 소수자 안배를 위해 '배려'해 준 비례 의석이다. 제대로 목소리를 내려면, 당에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으려면 독자적인 기반을 갖추고 올라와야 한다. 한국 태생의 한국인들이 도저히 '우리'의 바운더리 안에 끼워주지 않는 이자스민 의원이, 지역에서 지지를 받고 올라온다면 어떤 변화를 만들 수 있을까? '우리'라는 협소한 바운더리는 한 차례 무너지고 다시 쌓는 과정을 통해 더 넓어지지 않을까? 우리의 상상력도 더 광대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