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내 학벌 콤플렉스가 이상하게 뒤틀린 형태로 폭발할 때가 있다. 명문대를 다니며 학보사를 거치고 그 과정에서 은연 중에 학벌주의를 내재화한 사람들 앞에서, 어차피 언론사는 SKY 아니면 입사가 어렵다고 냉혹한 현실을 이야기해주는 척 하며 학력차별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발동하는 기제인 것이다.
"나는 국민대학교를 - 아직도 - 다니고 있다. 최종학력이 현재로서는 고졸인 셈인데. 언론사 시험을 따로 본 것도 아니고 혼자 글 쓰고 있었는데 갑자기 스카우트 되어 전업 칼럼니스트가 되었고, 마찬가지로 특채로 스카우트 되어 기자가 되었다. 그래, 명문대를 나오시고 학보사도 거치신 당신은, 대체 몇 년 동안 언론고시를 준비하셨죠? 그래서 입사하신 곳이 고작 거기예요? 어떻게든 구글 검색 쿼리에 더 잘 걸려보려고 기사 말미에 키워드를 몇 차례나 반복해서 적어넣는 어뷰징 기사나 양산하는 거기?"
내가 소위 '명문대' 출신이 아니라는 걸 자랑처럼 내밀고 다니는 것이다. 말하자면 "난 실력 하나로 올라온 거임"이란 건데, 이 또한 뒤틀린 형태의 학벌 콤플렉스란 걸 나도 잘 안다. 굳이 변명하자면 학벌을 이유로 무시 당했던 적이 차마 여기에 다 쓸 수 없을 만큼 많아서 생긴 일이다. 내가 사실은 전직 기자 출신이고 현재는 중앙 일간지에 이름을 건 칼럼을 4년째 쓰고 있는 칼럼니스트라고 이야기를 하면 상대는 대체로 그 무시에 대해 사과하는데, 이게 더 웃기는 일이다. 내가 전직 기자 출신의 칼럼니스트가 아니라 하더라도 출신 대학을 이유로 무시 당해야 할 까닭은 하나도 없다. 하물며 이런 타이틀도 없는 내 후배들이 부당하게 겪은 무시야 말해 무엇하랴.
물론 이건 거대한 착각에서 비롯된 일이다. 한국에서 입결 기준 명문으로 손꼽히는 곳에 가기 위해 필요한 건 축적된 지식이다. 그건 문재(文材)와는 전혀 상관 없는 덕목이고,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그 지식을 종으로 횡으로 엮어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지금 한국의 명문대 순위는 지식의 축적양이나 축적능력으로 매겨진 순위지, 그 지식을 지혜로 꿰어내어 새로운 담론을 형성하거나 조류를 만들어내는 능력으로 매겨진 순위가 아니니까. 여기에 요즘 한국사회에서 수능 고득점 + 논술 및 면접 고득점이 결코 개인의 노력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란 사실까지 더하면 더 자명해진다.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 명문대에 입학하려면 중산층 이상의 재력이 필요하다.
어떤 식으로 축적된 지식이든, 지식을 많이 축적한 이들이 많이 모이면, 개중 지혜를 가진 이가 그 지식을 꿰어 담론을 형성할 확률이 높아지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블라인드 입사를 해도 확률적으로 입결 기준 명문대생들이 언론사에 더 많이 입사하는 것도 사실이겠지. 하지만 그게 담론의 명문을 보장하는 거 같진 않다. 일간베스트 저장소의 접속 순위에 국내 유수의 명문대학교 전산실이나 도서관 IP가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예전에 한 후배와 이야기하다가 그런 결론을 내린 적이 있다. "국민대학교가 입결의 명문이 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노력한다면 담론의 명문이 될 수 있지 않겠어?" 나는 내가 국민대학교에 오기 전 잠시 몸 담았던 성공회대학교의 예를 들었다. "수능이 400점 만점인 시절이었는데, 그 때 사회학과 커트라인이 215점인가 그랬어. 성공회대학교를 입결의 명문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 학교는 명실공히 담론의 명문이잖아. 명문대학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건 수능 점수가 아니라, 그렇게 들어온 학생들이 교수들과 함께 어떤 가르침을 추구하고 어떤 담론을 만들어내며 그 학교만의 학풍을 어떻게 쌓아가느냐에 달린 걸거야."
나는 이 순위와 기준이 단순히 명문대에 못 들어간 사람의 정신승리가 아니라, 앞으로 대학과 사회가 참고하고 추구해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천편일률적인 대학평가 기준에서 어떻게든 상위권으로 올라가기 위해 각종 구조조정과 언발에 오줌누기 식 영어강의 개설에 골몰하는 대학교나, "서성한 중경외시"를 주기도문처럼 외우며 차별과 배제의 논리를 내면화하는 사회구성원이나, 이대로 가다간 공멸이란 생각이 든다.
언제까지 이런 서열표를 보고 있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