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손이상의 "예술을 서류로 증명하라"(클릭)에 대한 답변입니다. 이미 메일로도 보냈지만... 아무튼 우스꽝스러운 시대입니다. 제가 어쩌다가 이런 글을 쓰게 되었는지, 손이상이 찍은 사진들은 어떤지 확인하고 싶으시면 위의 링크를 따라가시면 됩니다. 작품 사진을 근거로 졸지에 범죄를 의심당하는 용의자가 된 한 예술가를 도와주고 싶은 분들이 계시다면, 저 링크를 확인하시고 힘을 보태주시면 좋을 듯 합니다. (2014년 5월 21일 자정까지 서류를 모으고 있다고 합니다.)
예술에 부여된 특권 중 하나는 당대에 금지된 것들을 상상하고 그에 대한 질문을 작품의 형태로 보여주는 것이다. 예술은 이를 통해 우리에게 금지된 것이 과연 정말로 부도덕하기 때문에 금지가 된 것인지, 혹은 당대에 한정된 도덕관념이 그것을 금지하고 있는 것일 뿐 사실은 부도덕한 것이 아닌지를 묻는다. 쉼 없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그 경계에 대해 사유하고 상상하고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 예술의 ‘의무’는 아닐지 모르나, 예술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임은 자명하다. (오독을 막기 위한 사족: 모든 예술이 그렇다거나, 혹은 그래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예술이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한 가지 오인해선 안 되는 것이 있다. 예술이 어떠한 금기를 넘는 표현을 한다고 해서 작가가 금기의 월경을 조장하거나 주장한다고 보는 것, 혹은 실제로 금기를 월경했다고 넘겨짚는 것이다. 이를테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나 박범신의 <은교>는 대중적으로 금기시되는 어린/젊은 여자와 나이 든 남자의 성적 결합을 상상하는 등장인물이 주인공이고, 글은 철저히 주인공의 시선에 의지해서 진행된다. 그러나 우리 중 그 누구도 나보코프나 박범신이 “그러니까 우리 모두 어린 여자와 성관계를 가져 삶의 활력을 찾읍시다.”라고 선동하려 했다거나, “실제 집필 중에 법적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가졌을 것이다.”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예술가는 그저 자신의 상상을 표현할 뿐, 그 메시지의 해석은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몫이다.
혹은 식인을 하는 연쇄살인마 한니발 렉터가 주인공인 <양들의 침묵> 시리즈나, 사이코패스 범죄자들만 골라 연쇄살인의 충동을 해소하는 연쇄살인마가 주인공인 미국 드라마 <덱스터>는 어떤가? 이 작품들은 연쇄살인마의 시점이나, 연쇄살인마의 논리에 동화되어 가는 수사관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이 작품들이 연쇄살인마의 사회적 효용을 강변한다거나, 냉정을 지켜야 하는 수사관이 연쇄살인마의 언변과 논리에 휘말리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수사기관의 무능을 보여준다고 받아들이는 이, 혹은 제작진이 “우리 모두 연쇄살인마가 되어야 한다.”는 선동을 하는 중이라고 이해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한니발 렉터를 연기한 안소니 홉킨스나, 덱스터 모건을 연기한 마이클 C. 홀이 실제로 연쇄살인 충동을 느끼는 소시오패스라고 의심하는 이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진가 손이상이 찍은 일련의 사진들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이 질문은 이렇게 다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사진가 손이상이 찍은 일련의 사진들만이 예외가 되어야 하는가?”)사진가 손이상의 사진은 기존의 권위와 그에 응전하는 구호 혹은 행위를 한 프레임 안에 배치시켜 사진을 보는 이들의 고정관념에 질문을 던진다. 이를테면 국가권력의 최전방인 일선경찰의 근무복을 입은 남자가 ‘대마초 비범죄화’라는 – 국가의 기획에 반하는 – 문구가 쓰여진 피켓을 들고 있는 모습이라거나, <정치와 반정치>라는 서적을 아예 거꾸로 덮어놓고는 그 위에 코카인 가루를 얹어 흡입하고 있는 청년의 모습, 이성애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끼리 키스를 하거나 남성끼리 항문성교를 준비중인 모습 등은 기존의 질서에 의도된 전복을 배치시킨 명확한 예술적 의도를 담고 있는 작품들이다.
다른 일련의 사진들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이 있어야 할 실내는 텅 빈 채 불이 꺼져 있고 출입구도 막혀 있는 반면 사람이 쉴 수 있는 공간이 아닌 실외에는 남자가 쓰러져 누워있는 사진이나, 의도적으로 거꾸로 그려진 십자가를 찍은 사진도 ‘정상상태’나 ‘질서’, ‘권위’에 대한 우리의 쉬운 고정관념에 자꾸만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생각하는 정상상태는 정말로 정상상태인가? 당신의 상식은 그대로 믿어도 좋은 상식인가? 손이상의 사진 앞에서 보는 이들은 처음엔 불쾌감을 느끼고, 그 불쾌감을 동력으로 자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세상의 모든 상식이나 도덕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던져지는 질문을 받게 되어 있고, 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손이상은 일련의 사진들을 통해 우리 시대의 도덕률에 집요하게 질문을 던진다.
사람이 앉아야 할 의자 위에 TV를 올려놓고, 정작 사람은 의자 밑에 머리를 끼우고 물구나무를 서 있는 사진은 어떤가? 이 작품에서 주체여야 할 사람과 도구여야 할 TV, 의자의 위치는 죄다 의도적으로 전복되어 있다. 심지어 사람의 시선은 TV를 향하고 있지도 않다. 마치 TV가 군림하는 밑에 깔려 고통 받는 듯한 사람, 그러나 이 사람은 한 손으론 V자를 그리고 있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 욕설을 하고 있다. 그것이 고통일 것이라는 – 보는 이들의 – 쉬운 고정관념마저 뒤집어 엎은 것이다. 응당 그럴 것, 혹은 응당 그래야 할 것들을 철저하게 뒤집어 보는 이들의 코 앞으로 밀어놓는 손이상의 작업들은 사람들의 게으른 관념을 뒤흔든다. 이처럼 명확한 연출의도가 드러나는 손이상의 사진들을 단순히 “실제 마약 흡입이나 항문 성교의 순간을 기록한 사진”이라고 보는 것은, 금기를 월경하는 것을 상상하고 표현하는 예술의 속성에 대한 철저한 몰이해가 아닐 수 없다.
내가 가장 의미심장하게 본 사진은 ‘NO SMOKING in Hell’이란 문구가 쓰여진 벽 앞에서 후드티를 뒤집어 쓴 남자가 담배를 태우고 있는 사진이다. (눈이 밝은 흡연자라면, 사진 속 남자가 태우고 있는 담배가 KT&G에서 생산한 보헴 시가 6mg이라는 것까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금연’이라는 뜻의 ‘NO SMOKING in Here’를 살짝 뒤집어 ‘지옥에서 금연’이란 뜻으로 바꾼 것도 도발적이지만, 그 앞에서 담배를 태우는 남자의 모습에 가면 손이상이 상상하는 도발과 월경은 더욱 대담해진다. 권위에 대한 응전을 주제로 작업된 손이상의 사진들을 볼 때 이 남자는 ‘금지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사진은 바로 지금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지옥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느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작가가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공교롭게도 이 사진은 예언적 울림으로 가득 차게 되어버렸다. 우리는 작가가 일련의 이미지를 연출해 찍었다는 이유만으로, 실제 마약 범죄를 의심받고 사법기관의 조사를 받는 것도 모자라, 예술을 서류로 증명해야 하는 시대에 도착했다. 단순히 금기를 넘는 상상을 표현했다는 것만으로도 범죄를 저질렀다거나, 범죄를 조장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혐의를 산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사드 후작이 자신의 저작이 담고 있는 음란한 상상 때문에 감옥에 수감되길 반복하다 끝내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16-17세기 프랑스와 21세기의 한국은 분명 달라야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예술가가 자유롭게 상상하고 표현할 권리조차 검열의 잣대로 가로막히는 초라한 현실을 다시 확인하고야 만 것이다.
나는 대중문화평론가로서 손이상이 찍은 일련의 사진들이 명확한 예술적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연출된 예술작품이라 판단하며, 이 사진들만을 근거로 누군가를 처벌하는 것은 부당한 탄압이라고 판단한다. 따라서 사진가 손이상에 대한 부당한 수사를 중단하고, 그가 다시 자신의 작업을 열심히 할 수 있도록 경찰 당국이 협조해 줄 것을 요구하는 바다.
2014년 5월 17일
대중문화평론가 이승한.
이승한 | 대중문화평론가. 대중문화웹진 <채널예스>에서 칼럼 데뷔, <텐아시아> 기자 근무, 현재 <한겨레> 대중문화칼럼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연재 중. tintin@iamtintin.net (서울 마포구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