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국립 고궁박물원은 세계 4대 박물관 중 하나다. 장개석과 국민당 정부가 대륙에서 대만으로 퇴각하면서, 대륙에서 가져갈 수 있는 유물이란 유물을 모두 긁어 가져가서 만든 게 바로 고궁박물원이다. 어찌나 소장한 품목이 많은지, 3개월 단위로 옥제품, 도자기, 회화, 청동 유물 8천점을 순환 배치하는데 60년째 유물이 한번도 겹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렇게 거대하고 압도적인 콜렉션을 자랑하는 국립 고궁박물원에서 길 하나 건너서 5분만 슬렁슬렁 걸어가면, 사설 박물관인 순익 원주민 박물관이 있다.
대만 섬을 터전으로 삼아 최소 4천년 간 그 땅에서 살았던 15개 부족민들은, 17세기 청나라에서 한족들이 이주해오면서부터 대만의 ‘원주민’이 된다. 대만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15개 부족의 유물을 전시한 순익 원주민 박물관은, 정말이지 너무도 절박하다. 지상 3층, 지하 1층 짜리 전시 규모는 어찌나 아담한지 꼼꼼하게 둘러본다 해도 1시간에서 1시간 반이면 모든 전시품을 다 볼 수 있을 정도다. 제대로 보려면 일주일은 족히 걸릴 가공할 스케일의 고궁박물원과 비교하는 순간 가슴 한 켠이 초라해진다. 콜렉션의 양상도 절박하긴 매한가지다. 대부분의 유물에는 이게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한 정보가 없고, 간혹 정보가 있는 전시품에는 ‘1993’이라고 적혀 있기도 하다. 93년도에 만들어진 토우가 전시품이 된다고? 이상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그럴 법도 하다. 대만이 민주화되기 시작한 1990년대에나 비로소 원주민의 존재와 그 권리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고 하니, 그 긴 세월 얼마나 많은 문화유산과 유물들이 망실되거나 파손되었겠는가.
억압자와 피억압자가 길 하나를 건너 마주보고 있는 상황. 비슷한 상황은 타이베이 시내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다. 이를테면 1947년 일어난 2.28 사건 관련 유적들이 그렇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일단 2.28 사건을 설명해야 한다. 2.28 사건은 17 세기부터 대만에 이주해 살고 있었던 한족계 주민인 ‘본성인’과,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새롭게 이주해 온 ‘외성인’ 사이의 갈등이 폭발한 사건이다. 본성인들은 일제가 물러나고 그 자리를 메운 중화민국 정부에 기대를 걸었지만, 국민당은 대만을 잘 몰랐고 심지어는 본성인들을 일제에 부역한 부역자 취급을 하기도 했다. 본성인들의 불만은 커질 수밖에 없었는데, 자신들을 부역자 취급을 하는 국민당 정부가 하는 짓들이 일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륙에서 파견된 소수의 외성인들이 사회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본성인보다 더 높은 임금을 받으면서, 다수의 본성인 위에서 군림하고 그들을 차별하는 상황. 본성인과 외성인 사이의 긴장은 점점 고조되어 갔다.
그러던 와중 1947년 2월 27일, 담배주류공사의 단속요원이 무허가로 담배를 팔던 여인을 단속하던 도중 권총으로 구타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이에 시민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정신 없이 도망치던 담배주류공사 직원들은 실탄을 발포했다. 이 발포로 인해 천원시(陳文溪)라는 이름의 학생이 피격 당하고 끝내 사망한다. 사망자가 생겼다는 소식에 군중들은 더 크게 분노했고, 라디오 방송국을 점거한 시위대는 대만 전역에 이 사실을 알리며 봉기를 요청했다. 이윽고 군경과 시위대의 충돌이 대만 전역에서 일어난다. 시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47년 2월 28일의 날짜를 따서 ‘2.28 사건’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의 결말은, 장개석이 파견한 국민당 군대에 의한 폭압적인 진압이었다. 이때 사망, 실종된 본성인의 숫자는 약 3만명으로 추산된다.
계엄령 하 국민당 집권시기만 해도 2.28은 금기의 언어였다. 2.28이 본격적으로 거론될 수 있었던 건 본성인 출신의 국민당원 리덩후이 총통이 집권한 이후의 일이었고, 진상조사 및 국가 단위의 추모가 거행된 것도 90년대의 일이었다. 1995년 국가가 공식적으로 사과하면서 일단락된 2.28 진상조사는, 2.28 당일 민중들이 최초로 모였던 타이베이신공원(당시의 ‘중산공원')을 ‘2.28 평화기념공원’으로 개칭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실은 ‘국부’로 추앙받는 장개석이 얽힌 일인 탓에 아직 제대로 된 진상조사가 다 끝나지 못한 사건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공원의 위치가 참 오묘하다. 2.28 평화기념공원에서 큰 길 하나, 샛길 하나만 건너면 총통 관저가 나온다. 물론 현재의 총통은 민주진보당 소속의 차이잉원이지만, 2.28 평화기념공원 바로 맞은 편에 3만명에 달하는 국민을 학살한 국가의 수장이 집무를 보는 관저가 떡하니 도사리고 있다는 건 대단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쓸쓸한 아이러니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2.28 국가기념관에서 장개석을 기리는 중정기념관까지의 거리는 도보 10분 거리. 그래서 2.28 국가기념관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은 중정기념관 역이다. 생각해보라. 4.3 평화기념관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거대한 규모의 이승만기념관이 있고, 4.3 평화기념관에 가는 가장 가까운 버스정류장이 이승만기념관 정류장이라면,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겠나? 그런 아이러니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도시가 바로 타이베이다.
원주민을 17세기부터 이주해 온 본성인이, 다시 그 본성인을 종전 후 이주해 온 외성인이 탄압해 온 역사. 외성인인 비밀경찰이 정권에 비판적인 외성인 지식인들을 사찰하고 고문해 온 역사. 겹겹이 쌓인 탄압과 억압의 역사. 2박 3일간 경험한 타이베이는 모두가 친절하고 상냥한 도시였지만, 동시에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두운 역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채 살아가는 도시이기도 했다. 입으로는 맛있게 먹었던 망고빙수를 그리면서, 머리로는 그 어두컴컴한 역사의 아이러니를 끊임없이 곱씹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