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다큐 인사이트〉 '걸;Girl'을 봤는데, 한국 걸그룹 역사 30년을 하나의 일관된 흐름으로 엮어내는 기획은 분명 쉽지 않은 프로젝트였을 것이다.
'걸;Girl'은 대한민국 걸그룹의 역사를 이런 방식으로 묶어낸다.
"아이돌과 아티스트 사이에서 어느 길을 가야 할지, 아무도 앞서 가본 적이 없는 길을 개척해야 했던 1세대.
→ 팬덤이 성장하면서 걸그룹에게 뭔가를 더 적극적으로 바라기 시작했던, 그래서 크리피한 '삼촌팬'이 등장했던 2세대.
→ 섹시나 청순 둘 중 하나를 연기해야 했던, 남성 팬덤을 주로 바라보았던 3세대.
→ 그리고 마침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4세대."
'걸;Girl'은 '노래하는 요정' S.E.S에서 출발해 아이브와 에스파, 뉴진스, 르세라핌, 아이들 같은 팀이 저마다의 색깔로 사랑받는 오늘에 도착한다.
한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저 서사를 쓰기 위해서 당시에도 2NE1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그룹, 4Minute처럼 '나 좀 세'라고 과시하던 그룹, f(x)처럼 동년배 여성들에게 소구하는 컨셉츄얼한 그룹, 브라운 아이드 걸스처럼 커리어 전반을 거치면서 여리여리한 감성부터 범접할 수 없는 센 캐까지 다 아우르는 그룹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대단히 축약이 된 것 같다는 점이다.
물론 다큐는 뒤로 가면서 "아, 그 때에도 그런 그룹들이 있었다."라는 식으로 언급하면서 역사를 상기시키려고는 한다. '걸;Girl'은 2NE1이 얼마나 많은 기록을 세웠는지를 자막과 영상으로 보여주고, 소녀시대가 시대에 맞춰 얼마나 많은 콘셉트를 시도하며 그 시기들을 지나왔는지를 몽타쥬로 보여준다. 그런데 솔직히 이야기하면, 그렇게만 말하고 넘어갈 일들은 아니었지 싶다.
그러니까 '걸;Girl'은 한국 걸그룹 역사를 제 관점대로 해석하기 위해 다분히 역사를 취사선택하는 구석이 있다. (3세대 걸그룹을 이야기하면서 그 세대를 대표할 만한 그룹이 아니라 그 세대에서 가장 폭력적으로 착취된 그룹 '나인뮤지스'의 류세라를 섭외했다는 점은, 제작진의 취사선택을 증명한다.)
나 또한 전반적인 맥락에서 '걸;Girl'이 택한 역사관에 동의하는 바다. 하지만 스토리텔링의 편의를 위해, 그 안에서도 파열음을 내면서 다음 세대 그룹들에게 롤모델을 제시했던 존재들을 축약한 건 여러모로 아쉬운 일이다. 오늘날의 4세대 걸그룹이라고 해서 어느 날 하루 아침에 진공 속에서 등장한 게 아니고, 앞세대가 선취해놓은 것들을 따라간 거니까.
한국 대중음악 산업 안에서 걸그룹이 어떤 식으로 제약을 당하고 착취를 당했는가에 대해 증언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피억압자로서의 정체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탓에 개척자로서의 정체성이 흐려져 버려도 괜찮은 걸까? 제작진이 공들여 만든 다큐멘터리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감탄하면서도, 나는 다큐가 말하지 않았던 그 개척자들 생각이 나서 못내 아쉬웠더랬다.
* 2023년 6월 4일 페이스북에 쓴 글을 갈무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