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엔 〈리턴 투 서울〉과 〈라이스보이 슬립스〉를 연이어 봤다. 보통 영화를 보고 나면 감흥이 가시기 전에 후다닥 페이스북에 메모를 남기는데, 이 두 편은 함께 보고 함께 고민하고 싶었다. 다른 마감이 급해 아마 정리된 글로 남기긴 어려울 거 같고, 한 가지만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얼핏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다룬 두 영화처럼 보이지만 두 영화의 시점은 명확히 다르다. (아마 캄보디아계 프랑스인으로 자란 데이비 추 감독이 ‘아시아계 입양인들의 정체성 혼란’에 더 무게를 뒀고, 코리안 캐내디언으로 자란 안소니 심 감독은 ‘코리안 디아스포라’에 더 무게를 둔 것에서 나온 차이가 아닐까.)
입양인(〈리턴 투 서울〉)과 이민자(〈라이스보이 슬립스〉)의 입장이 다르고, 그러니 한국에 있는 가족을 만났을 때의 반응이 다를 수밖에 없다. 평생 프랑스인으로 살았다고 강하게 외치는 입양인 프레디는, 인종적 친연성을 근거로 자신을 한국 사람이라는 틀 안에 가두고자 하는 한국을 ‘정체성을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공간’으로 바라본다.(〈리턴 투 서울〉)

반면 캐나다인도 한국인도 아닌 상태로 살아온 데이비드/동현은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정체성의 안도감을 느낀다. 조부와 숙부를 처음 만나 밥을 같이 먹고, 끝없이 펼쳐진 벼논을 보면서 데이비드/동현은 ‘라이스보이’라는 말이 더이상 창피하지 않다. 그에게 한국은 ‘뿌리를 확인하는 공간’이다.(〈라이스보이 슬립스〉)

평생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만을 가지고 살면 됐던 내가 두 영화를 다 이해한다고 말하는 건 무모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라이스보이 슬립스〉의 화해가 좀 너무 쉽게 이루어진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은 한다. 일평생 경계인으로 살아온 사람이 처음 방문한 한국에서 그렇게 쉽게 안도감을 찾는다고?
두 영화 모두 훌륭한 작품이고, 극장에서 보면 더 좋다. 다만 난 끝까지 정체성에 대해 확답을 내리지 못하고 흔들리는 〈리턴 투 서울〉의 프레디에 조금 더 마음이 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