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신대 총장을 지낸 정성구씨가 기독일보에 '교회가 더이상 땅투기 같은 거 그만 하고, 젊은이들이 아이를 낳아 키우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데 앞장서야 한다'는 글을 썼다. 핵심 주장만 보면 뭐 그런가보다 싶다. 간만에 개신교회가 뭔가 생산적인 이야기를 하는가 싶은데, 잘 나가다가 또 중간에 뜬금없이 성소수자들을 후려친다.
"유독 대한민국의 출산율이 바닥에 떨어져 조산원에서는 아기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다. 물론 여성가족부도 노력하고 있다지만, <차별금지법>, <퀴어축제>, <동성애> 같은 괴물과 잘못된 사상들이 한국전체에 전염병처럼 퍼져있어 결혼을 막고 있고 가정을 무너뜨리고 있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17121)
과연 그런가?
2022년 현재 동성혼을 법적으로 완전히 보장하고 있는 국가는 31개국, 주 단위로 동성혼을 허용하고 있는 멕시코를 더하면 32개국이다. (쿠바의 경우 혼인이 남녀의 결합이라는 헌법조항이 국민투표를 통해 개헌되었고, 현재 의회의 승인을 받아 관련 법률을 정비 중이라고 한다. 쿠바까지 넣어서 셈하면 33개국이다.)
그 33개국은 아래와 같다.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 캐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노르웨이, 스웨덴, 멕시코, 포르투갈, 아르헨티나, 아이슬란드, 덴마크, 뉴질랜드, 우루과이, 프랑스, 브라질, 아일랜드, 룩셈부르크, 미국, 콜롬비아, 핀란드, 몰타, 독일, 호주, 오스트리아, 쿠바, 대만, 에콰도르, 영국, 코스타리카, 태국, 스위스, 칠레
(이상 동성혼 합법화/동성혼 금지 위헌판정 순서)
자, 그럼 CIA 월드팩트북의 2022년 합계출산율 추계를 보자. 정성구씨의 주장이 맞다면, 동성혼을 허용한 이 나라들의 출산율은 처참해야 맞을 것이다. 가정이 무너지고 결혼을 못하고 어쩌고 저쩌고 하고 있을 테니까!
국가 (동성혼 합법화/동성혼 금지 위헌판정 순서) | 합계출산율 (Total Fertility Rate) |
네덜란드 | 1.78 |
벨기에 | 1.77 |
스페인 | 1.27 |
캐나다 | 1.57 |
남아프리카 공화국 | 2.18 |
노르웨이 | 1.83 |
스웨덴 | 1.67 |
멕시코 | 1.68 |
포르투갈 | 1.43 |
아르헨티나 | 2.18 |
아이슬란드 | 1.95 |
덴마크 | 1.77 |
뉴질랜드 | 1.86 |
우루과이 | 1.76 |
프랑스 | 2.03 |
브라질 | 1.80 |
아일랜드 | 1.92 |
룩셈부르크 | 1.63 |
미국 | 1.84 |
콜롬비아 | 1.95 |
핀란드 | 1.74 |
몰타 | 1.50 |
독일 | 1.57 |
호주 | 1.73 |
오스트리아 | 1.51 |
쿠바 | 1.71 |
대만 | 1.08 |
에콰도르 | 2.04 |
영국 | 1.63 |
코스타리카 | 1.86 |
태국 | 1.54 |
스위스 | 1.58 |
칠레 | 1.76 |
출처 | https://www.cia.gov/the-world-factbook/field/total-fertility-rate/country-comparison |
같은 자료에서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1.10로 나왔다. 33개국 중 한국보다 출산율이 낮은 나라는 대만 하나 뿐이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우리 칼빈대학교 석좌교수님이, 120여편의 논문을 쓰신 세계적인 석학 정성구 박사님이 틀리다니... 더 비아냥거리고 싶은 욕망을 꾹 누르고 건조하게 사실관계만 따지자면, 출산율과 차별금지법, 출산율과 동성혼, 출산율과 성소수자 인권 사이에 유의미한 관계가 없다는 건 확실해 보인다.
(추가: 글 다 쓰고 온라인 상에 공개하고 난 뒤에야 든 생각인데, 어쩌면 유의미한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보라! 동성혼을 허용한 국가들의 출산율은 한국과 비교했을 때 약 96.6% 확률로 높다!! 이 참에 포괄적 차별금지법도 통과시키고 동성혼도 허용하자! 이게 다 국가의 백년지대계를 위한 일 아닌가!)
한국의 합계출산율이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도 엄청 적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일단 내 집 마련이 너무 어려워졌고, 양질의 일자리는 줄어들었다. '빠듯하게 시작해서 조금씩 집을 키우고 형편이 나아지면 되는 거 아닌가' 싶지만, 한국 사회는 슬슬 계급 이동의 가능성이 현저하게 줄어드는 추세다. 빠듯하게 가정을 시작해서 내내 빠듯하게만 살 확률이, 빠듯하게 시작해서 형편이 나아질 확률보다 압도적으로 크다.
게다가 한국에서 축복받은 출산은 극히 제한적이다. 한국은 비혼자의 임신과 출산에 지극히 보수적이며, 미성년자가 임신과 출산을 할 경우 산모는 높은 확률로 학교에서 제적을 당하거나 손가락질을 받는다. 그런 게 없다 하더라도, 육아와 학업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을 만한 인프라 같은 건 없다. 비혼 성인의 출산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애 아버지는 어디 갔느냐, 어떻게 혼자 키우려고 하느냐, 그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아주 개방적이었네, 아이가 아버지 없이 자라면 바람직한 성 역할 모델을 배울 수 없다... 걱정을 빙자한 오만가지 손가락질과 수군거림을 견딘다고 치자. 다시 인프라 문제로 돌아온다... 축복받은 출산은 오로지 이성애 정상가정의 출산에만 국한된다.
이거 저거 다 떠나서 일단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아이가 행복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게 키워야 하는 초경쟁사회인 탓에, 너무 어렸을 때부터 경쟁을 시켜야 한다. 당장 내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게 행복하지 않은데, 이런 세상에 아이를 낳는 게 맞는 건지 납득하기 어렵다. 혹시나 내 아이가 조금이라도 정상성을 벗어난 아이라면? 성소수자로 태어나서 저런 혐오주의자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지는 않을까? 장애인으로 태어나서 끊임없이 대상화되고 주변화되는 건 아닐까? 아니, 다 떠나서 여성으로 태어났는데 여성혐오 범죄의 대상이 되면 어떻게 하지? 기득권에서 조금만 밀려나도, 정상성에서 조금만 어긋나도 행복은 둘째치고 기본적인 인권과 안전을 보장받기 어려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아이는 행복하게 자랄 수 있을까?
정성구씨가 한국 교회를 향해 땅 투기 같은 거 좀 그만하고 젊은이들이 아이를 안심하고 낳아서 키울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데 앞장서라고 요구한 건 모처럼 생산적인 논의라고 생각한다. 다만 정성구씨를 비롯한 한국 개신교 세력이 한국 사회 내 혐오를 전파하는 일을 멈춘다면, 그래서 아이가 어떤 형태의 가정에서 태어나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자라나든 손가락질 받지 않는 사회가 된다면, 조금이라도 덜 불행한 사회가 된다면, 한국의 출산율은 지금보다 더 오를 것이다. 그러니까 애먼 차별금지법, 애먼 성소수자 핑계 대지 말라. 출산율 걱정을 명분으로 통계를 무시해가면서 저지르는 당신들의 혐오가, 더더욱 아이를 낳기 싫은 사회를 만들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