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서 N회차를 찍으며 느낀 바들을 차근차근 적어보기로 했다. 아래는 페이스북을 통해 이미 발표한 두 가지 감상 포인트다. 스포일러로 가득한 글이니, 아직 영화를 안 본 이들이라면 글을 피해가시길.
1. 정안의 서사
영화 초반, 정안은 이주임과 아직 안 잤을 것이다. 하지만 이주임이 계속해서 플러팅하는 게 싫진 않았겠지. 흔들리는 자신이 낯설기도 하고. 그래서 해준에게 말했을 것이다. 이포로 전근 오면 안 되냐고. 나 매일 당신이 차려주는 이런 따뜻한 밥 먹고 싶다고. 그건 네가 내 곁으로 와서 날 좀 붙잡아 달라는 SOS 신호였으리라.
불행히도 해준은 눈치채지 못한다. 두 사람은 이미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프로페셔널들이고, 상대를 위해 제 커리어를 희생할 만큼 일을 가벼이 여기는 사람들이 아니니까. 상대에게 그런 걸 요구하지도 않을 거라고, 해준은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정안이 해준에게 이주임과 주말부부의 이혼율이나 섹스리스 부부의 이혼율 이야기를 나눴노라 말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보면 흥미롭다. 이주임의 존재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한 건, 절반쯤은 자기 자신을 다잡는 일이고 절반쯤은 해준을 속이는 일일 것이다. “그래, 이주임은 남편한테 그 존재를 편하게 얘기해도 되는, 그저 직장 동료일 뿐이야. 그래야만 해.”라는 자기 단속과, 그렇게 이주임의 존재를 자주 언급함으로써 해준이 경계를 풀도록 만드는 행동이 동시에 공존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주말부부와 섹스리스 부부 이야기도 같은 메시지다. 우리 지금 위험해. 안 그래도 주말부부고, 섹스리스 부부까지 되면 정말 우리를 붙잡을 건 애밖에 없어. 근데 애는 이미 수학올림피아드 준비한다고 내내 기숙사에 틀어박혀 있다. 부부의 삶 바깥에서 잘 지내고 있다. 그러니, 부부가 노력하지 않는다면 두 사람을 잡아줄 만한 게 아예 없다.
그래서 이 부부는 섹스를 하는데, 세상 이렇게 지리멸렬할 수가 없다. 남편이라는 자는 제 위에서 반복 운동을 하면서도 자신을 보는 게 아니라 방 구석 벽지에 핀 곰팡이를 노려보며 사건 생각을 하고 있다. 내 안에 파고드는 와중에도 내 곁엔 없는 거다.
정안은 용기를 내서 묻는다. 우리 좋지? 16년 8개월이 지나도록 계속 좋지? 한달 한달에 의미를 붙여 우리 내내 좋고 아직도 좋지 않냐고 묻는 정안에게, 해준은 시큰둥하게 답한다. 누가 이과 아니랄까봐, 그걸 다 세고 앉았냐고.
정안이 자라즙을 이야기하고, 석류청을 담그는 것도 결국 어느덧 식어버린 두 사람의 관계를 다시 예전처럼 돌리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하지만 해준은 그거 폐경 오면 편한 거 아니냐고 되물을 만큼 무심하다.
그런데 이포 시장에서 웬 중국인 여자와 마주친 남편이 멜로 눈깔을 하고 그 여자와 대화를 한다. 정안은 제 모든 노력이 다 헛수고였던 이유를 이제야 안다. 그래서, 그 모든 노력의 흔적들을 품은 채 그 집을 나선다.
2. 관음과 침범, 공간의 중첩
<헤어질 결심>에 반영된 여러 가지 연출 스타일 중 가장 이색적이고 관능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단연 잠복 중인 해준이 쌍안경으로 서래를 감시하는 장면일 것이다. 해준은 근무 중인 서래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데, 이미 서래에게 마음이 있는 해준에게 이 행동은 사실상 용의자 감시라기보단 관음이자 스토킹에 더 가깝다.
건조한 감시가 아니라 부적절한 탐닉이란 것을 강조하기 위해, 배운 변태 박찬욱은 줌인과 파워 줌아웃을 통해 아예 해준을 서래 옆에 세워둔다. 해준은 이제 마치 정말 서래 옆에 있는 것처럼 서래를 탐닉한다. 서래가 움직인 공간의 공기를 잔뜩 들이마시고, 물고기들에게 먹이를 주는 서래의 손가락이 어떻게 구부러지고 펴지는지를 감상한다. 서래의 부실한 저녁 메뉴를 염려하고, 식후 흡연이라는 안 좋은 습관을 걱정하고, 옆에서 재떨이를 받쳐주고 싶은 욕망을 상상한다. 해준의 시선은 멋대로 서래의 공간을 ‘침범’한다.
서래도 해준의 공간을 멋대로 침범한다. 서래는 ‘오빠PC방’으로 출동한다는 해준의 말을 엿듣고는 얼른 주소를 검색해 오빠PC방으로 차를 몰고 간다. 해준이 가장 위험하게 일하는 순간으로 차를 달려서, 해준이 체인메일 장갑을 낀 손으로 용의자가 휘두르는 날붙이를 잡고는 폭력을 휘둘러 용의자를 제압하는 광경을 염탐한다. 거칠어진 숨과 흐르는 피, 단정한 수트 차림의 이 남자가 어디까지 원초적이 될 수 있는지를 관음한 서래는, 집에 돌아와 입으로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머리로는 그 장면을 거푸 음미한다.
두 사람의 관계가 진전될수록 서래의 침범은 더 본격적이 된다. 해준의 부산 집에 초대된 서래는, 해준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해준의 책과 중국어 교재를 훑어보고, 커튼을 열어 해준이 벽에 붙여 둔 미결사건 사진들을 본다. 해준이 오래 쫓던 질곡동 살인사건 용의자의 자살을 막지 못한 채 부산으로 돌아온 날, 서래는 예고 없이 해준의 집으로 찾아온다. 이 사진들이 비명을 질러서 해준씨가 잠을 못 자는 거라며, 서래는 멋대로 벽에서 질곡동 살인사건 관련 사진들을 떼어낸 뒤 불에 태운다. 해준의 코트 안주머니를 서슴없이 뒤져서 탐구한다.
이 상호침범은 사전에 예고된 바 있다. 두 사람이 서로의 공간으로 본격적으로 침투하기 전, <헤어질 결심>에서 가장 이상한 편집이 나온다. 이포 집에서 아내 정안과 몸을 섞는 중인 해준, 그런데 해준의 시선은 오른쪽으로 45도 정도로 틀어져있다. 뭔가 골똘히 바라보는 해준의 시선이 바스트샷으로 잡히면, 그 반응샷으로는 사극이 방영 중인 TV가 붙는다. 180도 앵글로 정확하게 잡힌 이 편집 때문에, 처음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해준과 정안 부부가 TV를 틀어놓고 섹스 중인가 헷갈리게 된다. 하지만 이 TV는 부부의 것이 아니라 서래의 것이다.
서래는 부산 자기 집 거실에 앉아 사극을 보면서 극중 마음에 닿는 대사들을 조용히 따라 읊어본다. “독한 것”이랄지,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같은 말들. 한국어 사용자인 해준과 자신 사이를 가로막은 언어의 장벽을 허물고 해준을 기만하기 위해 사극의 언어를 익히는 서래가, 마치 해준의 시선 끝에 있는 것처럼 편집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해준이 실제로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포 집 방 구석 벽에 핀 곰팡이다. 해준은 그 곰팡이가 빚어낸 무늬를 보며, 서래의 몸에 난 폭력의 흔적인 피멍을 떠올린다.
물론 해준은 서래의 집을 염탐하는 사람이니, 이렇게 편집이 붙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일이 시간 순서상 해준의 잠복보다 먼저 일어난 일이라는 걸 잊으면 안 된다. 박찬욱은 의도적으로 두 사람이 한 공간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편집을 통해, 해준과 서래가 서로의 공간을 침범하는 미래를 예고한 셈이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침범해 끝내 둘의 공간이 중첩될 것이라고.
여기서 중요한 건 이 침범이 대체로 사전동의 없는 침범이라는 점이다. 박찬욱은 (적어도 해준과 서래에게만큼은) 서로 얼마나 상대의 공간에 침투해 들어가는가, 혹은 얼마나 제 공간을 침범하게 해주는가를 사랑의 척도로 제시하는 듯 하다. 사람들은 개별 개체로 온전히 홀로일 때 안도감을 느끼는데, 그 고립의 벽을 멋대로 찢고 들어오는 상대를 맞이하는 것, 나 또한 상대의 벽을 허물고 침투하는 것이 (적어도 이 두 사람의) 사랑의 본질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극 중에서 ‘안 사랑’하거나 ‘덜 사랑’하는 존재들은 상대의 침범을 극도로 싫어하며 명확하게 경계를 짓는다. 말러를 좋아하는 기도수는, 거실에 놓인 진공관 오디오로 말러를 들을 때면 중문을 닫고 커튼을 침으로써 격벽을 세워 서래가 거실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다. (비슷한 상황이 한 차례 나온다. 해준이 혼자 설거지를 하면서 에어팟으로 정훈희의 ‘안개’를 듣고 있을 때, 정안은 사전동의 없이 다가가 서슴없이 해준의 귀에 꽂혀있던 에어팟을 뽑아 제 귀에 꽂음으로서 해준의 격벽 안으로 침범한다. 둘 중 누가 상대를 더 사랑하고 있는지 이 장면만으로도 알 수 있다.)
서래의 두번째 남편인 임호신은 자신의 근육에 도취되어 거울을 보며 운동을 하던 중, 서래의 담배 연기가 제 호흡공간을 침범하는 순간 불 같이 화를 낸다. 담배는 좀 나가서 태우라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서래는 혼자 투덜거린다. 그 남자가 그 이상한 중국음식을 만들 때엔 내가 옆에서 담배를 태워도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저 새끼는 담배 연기 하나 못 견디면서 말로만 사랑하노라 한다고. 그리고 그렇게 상대의 침범을 원치 않았던 남편들은 차례로 버림받는다. 기도수와 임호신은 죽음으로, 에어팟으로 정안에게 격벽을 쳤던 해준은 결별로.
영화 속에서 반복해서 변주된 이 침범과 중첩의 모티프는, 영화의 마지막 사자바위 해변에서 극에 달한다. 마지막에 해준이 한참 서서 “서래씨 어디 있어요”라고 울부짖는 그 자리는, 사실 썰물일 때 서래가 판 구덩이 자리다. (바로 지척에 나무 장대가 아직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는 것으로도 암시된다.) 영화의 마지막, 서래가 정말 그 자리에서 기이한 방식의 생매장을 자살의 수법으로 택했다고 가정한다면, 바로 그 순간 (영화 속에서는 단 한 차례도 몸을 섞은 적이 없었던) 두 사람의 몸은 비로소 한 지점에 겹쳐지는 것이다.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았음에도, 해준은 영영 미결사건이 된 서래를 잊지 못할 것이기에, 해준의 몸은 서래의 몸 위에 한참 겹쳐져 있다. 두 사람의 공간은 이토록 온전하게 중첩이 된다. 아주 폭력적이고 이상한 방법으로, 이렇게 어떤 사랑이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