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연말 도널드 트럼프의 미 대통령직 당선이 확실해진 직후 나는 오랜만에 만취했고, 취기가 가실 무렵 SNS에 이런 글을 썼다.



"모든 사회에는 암묵적인 룰들이 있습니다. 정치가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컨센서스를 형성하고 하는 것들이죠. 트럼프는 그런 룰들을 깨뜨립니다. 만일 트럼프가 이기면 공화당과 민주당이라는 두 개의 거대정당이 모두 기본으로 돌아가서 스스로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거기서부터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절박한 바램입니다. (중략) 나는 단지 힐러리가 절대적인 이너시아(관성)을 대표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두렵습니다. 그것이 무엇보다도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그녀는 차가운 전사입니다. 은행들과도 연결되어 있구요. 그러면서 사회적으로 진보적인 것처럼 꾸미고 있습니다."

이럴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 대해선 지젝에 동의한다. '박근혜 당선 - 전국민 대통합' 루트와도 다른 게, 대선 당시 온갖 반성하는 척이라도 했던 박근혜와 달리 트럼프는 그냥 대놓고 반지성적인 태도로 일관했으니까. MB 5년을 겪고 박근혜를 찍은 한국이 받을 충격과, 오바마 8년을 겪고 트럼프를 찍은 미국이 받을 충격은 분명 다를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부숴져 망하면 새 시스템을 고민하게 되겠지"라는 계산을 볼 때마다 난 "어느 계층부터 부숴질 것인가"가 먼저 걱정이 된다. 나쁜 정치가 들어서면 언제나 변방부터 부스러지니까. 아마 분명 이주노동자, 무슬림, 성소수자, 유색인종, 장애인, 여성 순서로 부숴질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그러겠다는 의도를 전혀 숨기지 않은 사람인데도 사람들이 트럼프에게 투표를 했다는 점이다. 변방의 이들이 다치거나 말거나 그들은 진정한 미국인이 아니니 상관 없다고 믿는 이들이 그만큼 많단 이야기인데.

"트럼프가 이긴다 해도 미국이 독재국가가 되지는 않습니다. 트럼프는 파시즘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그의 승리는 아주 큰 깨어남을 가져올 것입니다. 새로운 정치 프로세스가 들어설 것입니다."라는 말이 내겐 미심쩍게 들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미 그런 사람인 줄 알고 트럼프를 뽑았으니, 그런 정책을 펼친다고 해서 사람들이 크게 놀라거나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할 것 같지는 않다. 마치 우리가 MB 5년을 나이브하게 보낸 것처럼. 독일이 전쟁과 인종주의에 대해 체면 차리는 시늉이라도 하며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한 건 제3제국과 아우슈비츠를 겪은 이후의 일이고, 한국에서 다시 '혁명'이라는 단어가 유효한 의미값을 지닌 채 호명되기 시작한 건 세월호 참사, 개성공단 영구 폐쇄, 사드 배치, 백남기 농민 소천을 지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이후의 일이다. 모든 반성과 변혁엔 수업료가 따르는 법이지만, 그 수업료의 지출 부담은 분명 제국의 변방에 몰릴 것이고 그 희생이 결코 작지 않을 것이란 암울함으로 가득한 오후다.


(2016년 11월 9일 페이스북 글)



"아무리 그래도 대통령직을 수행하면 조금은 달라지겠지"라는 사람들의 아스라한 희망과 달리, 도널드 트럼프는 자신의 공약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수많은 이들이 걱정했던 것처럼, 그는 상대적 약자들을 먼저 공격하기 시작했다. 제국의 변방이 미칠 듯한 속도로 부서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는 제일 먼저 여성이 자신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주체적으로 결정할 권리를 공격했다. 23일엔 로널드 레이건의 '멕시코 시티 정책'을 부활시켰다. 해외에서 임신 중단 시술을 하거나, 임신 중단 관련 정보를 포함한 가족 계획 지원을 하는 비영리단체에 미국 정부 자금 지원을 금지하는 법안이다. 임신 중단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단체라면, 설령 미국에서 받은 지원금이 임신 중단 관련 서비스가 아닌 다른 분야에만 쓰인다고 해도 지원 금지 대상이 된다. 이 정책이 처음 발효가 된 것은 1984년. 트럼프는 전세계 여성인권의 수준을 33년 전으로 후퇴시키는 중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이민자들의 땅인 미국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이민자들을 공격했다. 멕시코와의 국경장벽 건설 협상이 시작됐고, 백악관 홈페이지에서 스페인어 지원이 중단됐다. 참고로 미국 내 히스패닉 아메리칸 인구는 2015년 7월 기준 5660만여명, 이 중 가정 내에서 일상생활을 영유할 때 스페인어를 사용한다고 답한 인구는 3930만여명이다. 미국 내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인구집단이 사용하는 언어를, 그것도 기왕에 제공 중이던 것을 백악관 홈페이지에서 지운 것이다. 트럼프는 "난 영어를 사용하는 이들의 대통령이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이들의 대통령이 아니"라고 말하는 중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27일엔 테러위험국가 국민들에게 비자 발급을 중단하고 출신 국가 난민들의 입국심사를 강화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말이 테러위험국가지 사실상 이슬람 세계를 정면으로 겨냥한 것이나 다름 없다. 최소 90일간 입국이 제한되는 대상 국가는 이라크, 시리아, 이란, 수단, 리비아, 소말리아, 예멘의 7개국이며, 모두 이슬람 국가다. 이로 인해 합법적으로 비자를 발급받은 사람은 물론 이중국적자나 미국을 위해 일했던 이들조차 국적을 이유로 공항에 억류되기 시작했다. 난민입국 프로그램도 120일간 중단된다. 웃기지도 않는 일이지만, 그 와중에 '이슬람 국가에서 종교적 박해를 받는' 기독교인 난민의 입국은 허용한단다. 도널드 트럼프는 국제정치와 역사, 경제, 지정학적 요소, 종교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테러 문제를 오로지 종교의 문제로 환원시켜 버렸다.


트럼프가 이슬람 세계를 향해 중지를 날리는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몇 시간 뒤, 텍사스주 빅토리아 시의 모스크인 '빅토리아 이슬라믹 센터'에 원인 불명의 화재가 발생했다. 소방당국의 발빠른 대처에도 모스크는 전소됐다. 이 모든 게 임기 시작 1주일 만에 생긴 일이다. 이제 고작 1주일이 지났을 뿐이고, 아직 3년 51주가 남았다. 그 생각을 하면 머리가 어지럽고 헛구역질이 난다.


그래도 글을 미약하나마 희망으로 마무리해보자. 빅토리아 이슬라믹 센터 측은 펀딩플랫폼 GoFundMe를 통해 모스크 재건기금을 모금 중이다. 지난 15시간 동안 8000여명의 사람들이 목표치 45만불 중 37만불을 채웠다. 혐오와 증오, 대결을 부추기는 사람들에 맞서 싸우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우리가 국적과 종교, 인종, 성적 정체성과 무관하게 연대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는 것일테다. 모스크가 전소되었다는 비극적인 소식을 전하며, 빅토리아 이슬라믹 센터 측은 한 마디를 남겼다. "우리는 사랑으로 재건할 것입니다! (We will rebuild, with LOVE!)" 그렇다. 우리 시대에 무너져 간 것들, 도널드 트럼프로 대표되는 혐오세력들이 망가뜨린 것들을, 우리는 기어코 사랑으로 재건할 것이다.


GoFundMe 모금링크: https://www.gofundme.com/victoria-islamic-center-rebuilding



현지시각 2017년 1월 27일, 빅토리아 이슬라믹 센터에 원인불명의 화재가 발생해 모스크가 불타고 있다. 사진: Victoria Islamic Center현지시각 2017년 1월 27일, 빅토리아 이슬라믹 센터에 원인불명의 화재가 발생해 모스크가 불타고 있다. 사진: Victoria Islamic Center


신고

트랙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URL을 배껴둬서 트랙백을 보낼 수 있습니다

다른 카테고리의 글 목록

word 카테고리의 포스트를 톺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