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영 변호사
1914. 8. 10 ~ 1998. 12. 17


서울대 최초의 여학생. 한국 최초의 여성 사법시험(고등고시) 합격자.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한국 최초의 여성 법학박사(서울대학교 법학박사). 한국 최초의 여성 법과대학장(이화여자대학교 법정대학). 한국의 독립운동가, 여성운동가, 민주화운동가.

결혼 후 10년 가까이 남편 정일형의 독립운동을 지원했고, 광복 직후 정일형의 "보따리를 바꿔맵시다. 평생 소원이던 법률 공부를 하시오"라는 지지의 말과 함께 법률 공부에 임함. 여성으로는 최초로 제2회 고등고시에 합격(1952). “야당 정치인 정일형의 아내인 것도 찜찜하고 여자 판사가 말이 되느냐”는 이승만 대통령의 비토에 판사 대신 변호사 개업에 나섬. 첫 여성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자 그간 법과 인습의 한계에 눌려 울던 수많은 여성들이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 옴. 이에 1952년부터 이혼 여성의 재산분할 청구권을 인정하는 가족법 개정안 요구, 1956년 여성법률상담소(현재 한국가정법률상담소로 확대 개편) 개소, 1962년 가정법원 설치 운동 전개. 1976년 여성운동가 100인의 서명 및 지원을 받아 여성백인회관 건립, 같은 해 명동 3.1 민주선언에 참여했다가 이듬해인 1977년 실형을 선고, 변호사 자격 박탈. 1980년 복권되어 변호사 자격을 돌려받자 마자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에서 김대중의 변호인으로 활약. 동성동본 금혼령 폐지, 호주제 폐지, 여성 인권 운동, 여성 노동 운동,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평생을 헌신.

"나는 길이 없는 데로 다녔다. 내가 간 길은 누구도 가본 적이 없어. 나는 그 길을 만들어 걸었다. 그런만큼 험한 길이기도 했다. 여자로 태어나서 그것도 아이가 넷 딸린 주부의 몸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변호사가 되고, ‘법률구조’라는 말조차 없던 시절 법을 몰라 고통을 받던 여자들을 껴안고 울어야 했으며 한국 가정법률상담소를 세운 것 등등… 내가 걸어온 길은 가시밭길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가야만 했던 길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어려서부터 그렇게 보고 배웠기 때문이었다."

1971년 제1회 법을 통한 세계평화상
1975년 막사이사이상
1982년 유네스코 인권교육상
1984년 국제변호사협회 국제법률봉사상
1989년 브레넌 인권상
199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0년 3‧1문화상




임윤지당
1721 ~ 1793


조선 최초의 여성 성리학자.

평생을 당대 여성 문인들의 관심사였던 가정이나 애정과 관련된 글 대신 철학과 역사 관련 연구, 경전 연구에 매진. “하늘에서 부여 받은 성품은 남녀의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며, 모든 이가 순수하고 지극히 선한 본성을 지녔기에 이를 회복하면 (여성을 포함해) 누구나 성현이 될 수 있다고 봄. 여성의 본성을 유순한 것으로, 남성의 본성을 씩씩한 것으로 보았던 당대 성리학의 한계에 갇혀 있었다는 한계가 있으나, 이런 차이에도 양성 간에 위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음양과 같이 동등한 위치에서 상호보완하는 관계라고 주장. 양성의 일이 유별하다고 여긴 당대 인식의 한계 안에 갇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당대 드물었던 ‘학문하는 여성’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꾸준히 의식하며 여성의 도덕적 성취에 대한 강한 확신을 드러냈다. 당대의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담은 모순적 인물. <이기심성론>에서 당대 실학자들이나 서양 연구서적의 영향 없이 독자적인 연구를 통해 지구의 모양새는 계란처럼 둥글 것이라 추론해 낸 대목에서는 윤지당의 학문적 깊이를 엿볼 수 있다.

유고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




최은희
1902 ~ 1984. 8. 16


식민지 조선 최초의 여성 기자, 항일운동가, 대한민국의 여성운동가

3.1 만세 시위 및 백천 만세 시위 조직. 일본 관헌의 지속적인 시찰을 받음. 일본여자대학 3학년 재학 중이던 1924년 <조선일보> 최초의 여성 기자로 스카우트 됨. 정치부, 사회부, 학예부를 거치며 8년간 <조선일보> 기자로 활약. 각종 변장을 한 채 암행하며 특종들을 건져 올렸던 것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미와 경부의 뒤를 밟아 종로경찰서 취조실에 잡지사 <개벽> 관계자들이 붙잡혀 있는 것을 발견, 단독 기사로 보도해 신석우 당시 부사장으로부터 ‘신문계의 패왕’이란 별호를 받기도. 지면에 ‘가정란’을 신설해 가정 내 상식은 물론 여권 신장 및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다루는 기사를 기획, 생산했으며, 부인견학단을 조직해 부인들의 사회화에 앞장 섬. 해방 직후 1945년 9월 여권실천운동자클럽 조직 및 대표 취임, 46년 서울보건부인회 부회장, 1948년 대한부인회 서울시 본부 창설위원, 1952년 대한여자국민당 서울시 지부장, 같은 해 5월 8일을 한국의 어머니날로 제정할 것을 제안해 1956년 정식 기념일로 채택(현재는 어버이날로 개편). 1973년 여성 항일운동의 역사를 정리한 <한국근대여성사 - 1905년부터 1945년 조국을 찾기까지> 3권 발간. 1980년 <여성전진 70년: 근대여기자의 회고> 발간. 사망 후 1985년 <한국개화여성열전> 발간.




강주룡
1901~1932.8.13


식민지 조선의 노동운동가, 항일운동가, 최초의 고공농성자.

21세 되던 해 5살 어린 남편과 함께 독립군부대에 입대해 무장투쟁. 남편 사망 뒤 귀향. 1926년 평양 고무공장 입사, 노동조합 가입. 1930년 임금을 삭감하려는 사용자 측에 맞서 평양 고무공장노동자조합 소속 11개 공장 1800여명 노동자들 파업 돌입. 1931년 5월 16일, 평원고무공장의 일방적인 임금인하 통보로 평양 시내 고무공장 노동자 2300여명 임금까지 도미노 삭감 위기에 몰림. 5월 28일 사측이 49명 전원 해고를 외치며 경찰 병력을 동원해 단식투쟁 중이던 노동자들 강제 해산. 노조 간부 강주룡, 평양 을밀대에서 목을 메어 자살할까 하다가 마음을 바꿔 고공농성 시작. "우리 49명 파업단의 임금 감하로 끝나는 게 아니라 평양 2300명 고무공장 직공의 임금 감하로 이어질 것. 죽음 각오하고 올라왔다. 임금 감하 취소 않으면 근로대중을 대표하여 죽음을 명예로 알 뿐.” 몰래 올라온 소방관에게 떠밀려 그물 위로 떨어지면서 8시간 만에 고공농성 종료. 검속기간인 29일 저녁부터 6월 1일 새벽 2시 동안 밥 한 술 안 뜨고 단식 투쟁 이어감. 석방되자 마자 파업 본부로 복귀해 파업 독려. 6월 8일 사측의 임금 삭감 저지하고 임금 동결. 단 파업참가자 전원 복직은 이루지 못해 강주룡은 해고노동자가 됨. 다음날 평양 최초의 적색노조인 평양지역 혁명적노동조합 설립에 함께 참여했다는 이유로 긴급 체포. 1년간 옥중 투쟁 중 병을 얻어 병보석으로 석방. 1932년 8월 13일 평양 빈민굴에서 투병 끝에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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