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05 : 어떤 9년

2016.08.05 02:45
소대 복도를 지키는 불침번 일병은 토익 단어장을 읽으며 쉬지 않고 원더걸스의 텔미와 빅뱅의 거짓말을 반복해서 틀어놓고 있었다. 논산 입소 이틀째 밤, 입대 직전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들어온 스물 네살의 나는 저 망할 놈의 시디플레이어를 부숴버리고 싶단 충동에 시달렸다. 안 그래도 입대는 뒤숭숭한 법이거늘, 이별한지 만 72시간도 채 안 된 내 심경은 불침번 일병놈이 틀어놓은 노래들 때문에 더 거지 같아졌다. 너 없는 내겐 웃음이 보이지 않아. 눈물조차 고이지 않아. 더는 살고 싶지 않아. 정말 엿 같은 3분 30여초가 흐르고 나면 텔미가 흘러나왔다. 난 엊그제 이별했는데, 그런데 네가 날 사랑한다니 어머나 다시 한번 말해보란 가사를 듣고 있는 내 심경은 입소대대에서부터 누더기 상태였다.

녀석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자대배치를 받고 만난 선임들은 알고 보니 서로 부대 내 주도권을 잡으려 파워플레이 중이었고, 잔대가리만 굴릴 줄 알았지 엉덩이가 무거웠던 나는 자주 실수하고 자주 욕을 얻어먹었다. 카투사의 2인1실 시스템은 얼마나 큰 리스크인지, 선임과 화기애애한 사이일 때는 몰라도 선임과 사이가 틀어지는 순간 그 방의 공기는 형언할 수 없을만큼 냉랭해진다. 도망갈 곳도 없는 얼음장 같은 그 곳에서 나는 내 인생도 그 지경이 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에 사로잡혔다. 글쟁이 커리어는 시작하기도 전에 멈췄고, 목표했던 대학엔 3번째 낙방했고, 군에 있는 동안 친구들과 쌓인 오해 때문에 첫 휴가 때 만날 지인이 절반으로 줄었으며, 선임과는 사이가 거지 같은 인생. 가능성들이 절대영도를 향해 서서히 얼어붙는 삶.

시발 그래도 너는 카투사라 상황이 낫지, 땅개에 비하면 카투사 존나 편하잖아. 논산에서 친해진 친구와 통화하다보면 불현듯 외로워졌다. 눈치 봐야 할 상관이 양쪽에 있고, 한국군과 미군 사이의 파워플레이라도 벌어지면 중간에서 고래등이 터지고, 양쪽의 사정을 헤아리느라 양쪽에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까지 몰리는 카투사가 부럽다고? 이라크 파병의 스트레스로 이가 거의 다 빠진 상황에서 전화기로 치과예약을 하는 파병용사의 남부 사투리 영어를 너희는 알아들을 수 있겠어? 그거 못 알아 들었다고 욕을 먹는 심경을 이해하겠니? 이등병 주제에 한국군 장교들과 미군 장교들 사이의 미스커뮤니케이션을 미군 대령한테 대신 설명해주고 있어야 하는 상황은 상상이 가? 이게 편해?

대체로 그런 날들이었다. 내 방은 막사의 꼭대기 층인 4층이었는데, 스트레스가 심하던 날엔 4층 비상계단 난간에 몸을 기대고 하염없이 아래를 내려다보곤 했다. 1층 화단까지 가는 가장 빠른 루트는 여기서 뛰어내리는 거겠지. 그런 생각으로 가득하던 어느 날, Gee를 듣게 됐다. 야 승한아 이거 들어봤냐. 이병 이, 승, 한. 아직 못 들어봤습니다. 이게 소녀시대 신곡인데 말이야... 선임이 보여준 영상 속에서 소녀시대는 너무 반짝반짝 눈이 부시다는 말로 사랑을 고백하고 있었다. 뻔하디 뻔한 사랑 노래, 새로울 것 하나 없는 노래인데 그걸 넋을 잃고 듣고 봤다. 군대의 힘이었던 걸까, 아님 그냥 뭐라도 위로가 필요했던 걸까. 아무튼 그 이후로 난 비상계단에 나가도 굳이 아래를 내려다 보지 않게 됐다.

구원이라고 하면 거창하지만 위안이라고만 하기엔 조금 아쉬운 무언가. 소녀시대는 내게 그런 존재가 됐다. 그들은 내가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어질 때면 시의적절하게 힘을 내 이만큼 왔잖아 이것 쯤은 정말 별 거 아냐 라고 말해줬고, 마음 속에 담은 말들을 다 들어 줄테니 숨김없이 말해보라고 말해줬다. 연애를 쉰 적은 없었으니 흔히 팬들이 아이돌에게 느낀다는 가상연애 같은 감정은 아니었다. 그냥, 가장 빛나지만 동시에 가장 멀리 있고 가장 막연한 우군 같은 거. 내게 소녀시대는 그런 존재였다. 직업의 특성 상 어느 누구를 배타적으로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어려웠기에 말은 안 했지만, 그래도 노래방을 가면 I got a boy와 다만세는 꼭 부르고 와야 직성이 풀리는, 일코에 매번 실패하는 덕후의 삶.

주관적인 애호를 조금은 드러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정말 우연한 계기였다. 김세윤 작가님의 추천으로 예상치도 못한 <써니의 FM 데이트> 고정 게스트가 된 나는, 써니를 실물로 보고 할 말을 잃어버릴 만큼 긴장했지만 굳이 티를 내려 하진 않았다. 프로로 일을 하러 만난 사람이라면 그렇게 대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최대한 할 말만 하고 가벼운 안부인사 정도 나누는 선을 지키려 노력했다. 그래도 기본적인 애정은 다 티가 날텐데 뭐. 덕후가 일코를 한다 한들 그게 얼마나 가겠어. 그런데 반 년 넘게 매주 방송을 함께 한 후 조금 더 친해졌을 무렵 써니가 한 말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니 이렇게 덕심이 짙으셨어요? 아니 써니씨 내가 팬이라고 했잖아요. 그냥 하신 말씀인 줄 알았죠. 객관을 지키겠다는 나의 몸부림이 과했던 건지, 그는 내가 판타지아 공연을 보고 난 소감을 말해준 다음에서야 비로소 내 병증의 깊음을 파악했다. 너무 꽁꽁 싸매는 게 꼭 능사만은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이 밀려오는 순간이었다.

연전에 쌓게 된 인연 덕에, 난 아직도 종종 그와 대화를 나누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나는 한국에서 여자 아이돌 그룹 멤버로 사는 것의 피곤함과 어딜 가도 알아보는 사람 천지라 사생활이 불가능한 그의 삶을 근심하고, 그는 늘 웃으며 괜찮다고 말해주는 이 비대칭의 대화. 소녀시대는 내가 일층 화단을 향해 돌진하고 싶었던 군부대의 밤들부터 연일 마감에 시달리는 30대 중반의 날까지 내게 늘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었다. 우린 괜찮다고, 당신의 힘든 삶도 희망을 가지고 계속 살아봐도 괜찮다고, 상처로 깨진 유리조각도 별이 될테니, 지금 힘든 것들도 나중이 되면 다 괜찮아 질 거라고. 내가 그들에게 해준 것은 기껏 해야 음원 스트리밍과 음반 구매 정도가 전부였지만, 그들은 내게 또 하루 살아봐도 괜찮은 삶을 줬다. 나는 아주 많은 날들을 그들에게 빚졌다.

고작해야 걸그룹인데, 그게 삶의 이유가 되다니 무슨 소리인가 싶을 이들이 있겠지. 그러면 네 가족은, 부모 형제는, 네 애인은, 네 고양이는 어쩌고? 하지만 이건 누가 더 중요하고 누가 덜 중요한 층위의 순위 싸움이 아니다. 가까이 있어 날 부축해 준 내 사랑하는 이들이 내 생의 이유이고, 내가 건강하게 살아서 녀석들 가는 날까지 옆에서 챙겨줘야 하는 고양이들이 내 생의 이유인 것처럼, 내 삶의 많은 순간 BGM이 되어준 소녀시대 또한 그 순간을 버텨내게 해준 삶의 원동력이자 이유였다. 2007년 8월 5일 SBS 인기가요 데뷔 무대 다시 만난 세계에서, 2014년 도쿄돔 무대에서 눈물범벅이 되어 부른 발라드 버전 다시 만난 세계, 그리고 며칠 전 뜬금없이 내 타임라인에 흘러들어온, 세상에서 가장 애처로운 이대생들의 다시 만난 세계 합창까지. 지난 9년의 내 삶 속 중요한 순간마다 소녀시대와 그들의 노래는 마치 이정표처럼 서서 생의 변곡점을 기록하고 있다.

마음을 글로 다 풀어 100% 보여줄 문재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에 비해 내 글은 가난하고 보잘 것 없어서 그들에게 누나 안 끼치면 다행인 일일게다. 비문이 난무하고 오글거리는 고백으로 점철된 글이라 부끄럽지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직업적 윤리니 객관이니 혹은 사회생활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최소한의 염치니 다 내려놓고 이야기하려 한다. 당신들과 함께 한 9년에 감사 드립니다. 앞으로 더 오랜 시간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당신들이 행복해지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응원하겠습니다.

워낙 아크로스틱이니 세로드립이니 난무하는 시절이라 하나도 새로울 게 없지만, 가진 재주가 이 뿐이라 간만에 재주 한번 넘어봤다. 오늘은 8월 5일이니까. (아크로스틱이나 세로드립을 왜 언급했는지 잘 모르겠는 이들이라면,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 각 문단의 첫글자들만 따로 읽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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